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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벽을 넘어- IT 산업동향에 눈을 뜨며

조성구의 대 삼성열전-2

GoodMorningLonDon | 기사입력 2014/11/13 [07:10]

첫 번째 벽을 넘어- IT 산업동향에 눈을 뜨며

조성구의 대 삼성열전-2

GoodMorningLonDon | 입력 : 2014/11/13 [07:10]

1. 충청도 촌놈의 상경

 

 

내 아버지는 군인정신이 투철하신 직업군인이셨다. 그래서 생활의 신조로 “이 세상에 불가능 은 없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 삼형제에게 언제나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콩 심은 곳에는 반드시 콩이 난다.”며 세상을 정직하게 살 것을 당부하셨고 요령과 반칙을 가장 멀리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세상 이치는 아버지의 신념과 노력과는 큰 괴리가 있었다. 내가 지금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겪고 있는 것처럼,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 시절 과자공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로 일하시면서 온갖 멸시와 조 롱을 받으면서도 악착같은 성실함으로 돈을 모으셔서 집안 어려운 친지들을 돌보셨다. 특히 할머니 집안이 어려워서 할아버지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세가 어려워지 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형제분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에 학비를 벌기위해 참외장수를 할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곧바 로 학도병으로 참전하시면서 직업군인의 삶을 사시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를 잘하셨던 아버님은 간부후보생 시험을 거쳐 통역장교가 되셨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버님의 진급은 육군사관학교 장교출신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대위복무기간만 12년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지만 매번 진급에선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로하셨던 할아버님 병원비용과 가족들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서 아버지는 월남 참전을 하시게 되었다. 그 당시 월남전에서는 한국군의 지휘관 부족으로 곧바로 소령으로 진급하셨고 몇 번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시면서 화랑무공 훈장을 받으셨다. 평시보단 전시상태에서 진급속도가 빨라서 귀국하실 때에는 중령이 되셨다. 

 

그러나 또다시 진급 누락으로 중령으로 12년을 더 복무하시게 되었다. 후배 장교들이 대령에서 별을 달았지만 아버님은 매년 진급심사에서 탈락이 되셨기 때문이다. 결국 33년간의 군 생 활을 중령으로 마감하시고 전역을 하셨다. 집안 몇몇 어르신은 아버님이 융통성이 없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너무 고지식하게 산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누구 에게 아부를 하거나 편법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이미 우리 사회는 아버지 세대도 그러했지만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매사에 올곧고 철두철미했던 성품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께서는 활달한 성격을 지니셨다. 동네에서 부녀회장을 하실 정도로 오지랖도 넓고 신용도 좋은 분이셨다. 또 어려운 이웃이 있 으면 꼭 찾아가서 챙겨주고 배려도 해주시는 후덕한 성격이셨다. 또 집안의 큰며느리로서 집 안 제사나 잔치를 하더라도 넉넉하게 음식을 장만하시고는 항상 친지들과 이웃을 배려하시고 함께 나누어 드시는 성품이셨다. 

 

나는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라며 정직한 노력을 삶의 신조로 삼으시던 아버지의 철두철 미한 성격과 어머님의 어려운 이웃을 배려할 줄 아시는 후덕한 인심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 고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삶을 통해서 내 인성이 완성된 것 같다.

아버지의 철두철미함은 내가 창업 후 실수를 사전에 방지하는 꼼꼼함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런 철두철미함과 꼼꼼함만 있었으면 세계 최고의 제품 개발에 성공하고 시장을 석권하는 사 업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넉넉한 배려와 활달한 성격을 닮은 나는 고객과 비즈 니스 파트너 사이의 견해 차이를 보다 쉽게 조율할 수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소중한 유산으로 제품을 개발 할 당시에는 매사에 철두철미함으로 무결점에 가까운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사업의 핵심인 영업과 경영환경에서 는 고객과 비즈니스 파트너들에 대하여 넉넉한 포용과 배려를 할 수 있었다. 결국, 사업하던 시절 내내 조상님의 소중한 유산은 단 시간 내에 세계 최고의 명품제품을 만들고 시장을 석권 할 수 있는 비결이 되었다.

 

 

첫 번째 벽을 넘으며

 

1970년대 시절은 산업화 붐이 최고조였던 시기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기치아래 공업계 고등학교를 육성하고 산업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온 나라가 산업현 장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인문계 고등학교 보다는 공고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시절 달달 외우는 주입식 공부를 좋아하질 않았다. 어려서부터 뭔가를 뜯어보고 고치 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인문계보다는 공고에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선통신 분야에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뭔가를 뜯어보고 고치는 게 좋았던 나는 대전에 있는 계룡공고 통신과에 입학하게 되 었고 타고난 손재주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는 무선설비 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다. 그 무렵 내가 딴 자격증은 3학년 선배들도 합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선통신에 분야에 남다른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고에서 무선통신 분야에 대한 기초를 다진 후 나 는 공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군복무도 공군 통신기술병으로 지원 입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형님께서 육군에 입대 후 위생병 주특기를 받았다가 집으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에서 광주 군의학교 봉투를 보시고는 해당 부대 책임자에게 연락을 하셔서 “내 자식은 군대생활로 더 강한 젊은 청년이 되어야 한다.”며 탱크 부대로 보내줄 것을 말씀하셨는데, 나는 육군출신 의 아버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공군 기술병에 지원입대를 했다. 1984년 1월 4일 큰 눈이 내린 이른 아침에 부모님께 큰 절을 올리고 군대를 가는데 아버님께서는 공군에 간다며 아주 못마땅해 하셨다. 우연찮게 형님께선 그날 전역을 하셨는데 나는 형님과 바톤 터치를 하게 되 었다. 

 

어려서 또래 친구들과 뛰어놀던 대전 둔산동의 공군 신병학교에서 기본군사훈련 6주를 받았

다. 그리도 통신병 기술교육 12주를 받고는 평택의 7항로 보안단에서 청주 17전투비행단으로 배속되었다. 전투비행단에서는 레이더 정비병으로 복무했다. 군복무시에는 미군들이 운영하는 최첨단의 유무선 통신설비에 대한 교육으로 다양한 경험 또한 쌓을 수 있었다. 결국, 군복무 를 통해서도 미래에 펼쳐질 IT 사업 부분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흔히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전역 후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 피 하면서 학업에 전념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복학 후에는 줄 곳 장학금을 타면서 좋은 성 적으로 졸업하였고, 미래의 창업을 예견하듯 서울에 있는 중견 컴퓨터 회사에 취직까지 하게 되었다. 충청도 촌놈이 서울에 있는 컴퓨터 회사에 취직을 하는 것은 당시 지방대 출신들에게 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상경을 앞두고 어머님의 표정은 기쁨보다는 어둡기만 했다. 집안 가세가 넉넉하지 못해서 서울에 월세방조차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경하던 날, 어머니께서 쌈짓돈 10만원을 내 손에 꼭 쥐어주시면서,

“얘야 에미가 이것밖에 못해줘서 너무 미안하구나. 서울에서 직장생활 잘하고 밥 꼭 잘 챙겨 서 먹어야 한다.” 

그렇게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잡고 울먹이셨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 렸다. 당시 여동생이 대학을 다니고 있던 터라 집안 형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쌈짓돈을 모아서 주신 10만 원으로 나는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였을 때는 촌놈인 내가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두려움과 함께 걱정도 많았다. 

 

첫 봉급을 탈 때까지는 사무실에서 하루 세끼 모두를 해결했다. 다행스럽게도 회사 구내식당 은 하루 세끼 모두를 제공했다. 잠은 근처 24시간 사우나를 돌면서 잤다. 어떤 날은 회사 업 무용 차안에서 자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야근을 핑계로 사무실에서도 잤다. 양복은 물세탁이 가능한 것으로 달랑 한 벌 뿐이었는데 겨울이 다가오자 엄청 추웠다. 

 

그렇게 몇 달 봉급을 모아서는 수원 성균관대학교 근처에 사글세방을 구했는데 퇴근이 늦은 날에는 주인 아주머님께서 고맙게도 연탄불을 갈아 주시곤 했다. 아침 출근길, 서울 마포구 대흥동 4거리에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서울의 찬가’가 울려 퍼질 때면 지방대 촌놈이었던 내가 무슨 산업일꾼이 된 것 마냥 벅찬 감격이 밀려오곤 했다.

 

그러나 그런 벅찬 감격과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지방대 출신으 로서 냉엄한 현실을 느끼면서 사회생활 초년병이 감내하기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함 을 서서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당시 회사의 대표이사부터 핵심 경영진 모두가 서울대와 명문 대 출신들이었다. 입사 동기생이라도 서울대와 명문대 출신들의 대우와 진급 속도는 지방대 출신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지방대학교 출신 신입사원들의 아침 첫 일과는 단순한 복사 심부름과 간부들 승용차에 기름을 채워오거나 세차장에서 차를 닦아오는 일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지방대 출신의 천대는 미래의 내 사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출신 성분에 따른 차별과 편견은 어느 회사 조직에서나 널리 퍼 져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또 다른 벽들이 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부서의 회식 자리는 나의 현 위치가 어딘지 느낄 수 있는 자리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다들 알아서 서울대와 명문대 출신들 그리고 지방대 출신들이 나누어서 앉는다. 나처럼 지방대 출신들은 알아서 끝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조직 분위기 자체 가 그런 식의 자리배치를 무언적으로 압도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마음씨 넉넉한 임원이 분위 기를 위해 지방대 출신들을 가운데 자리에 배치하기도 했지만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따갑 기만 했다. 1차 회식 후 뒤풀이 술자리는 더 극명하게 달랐다. 출신 성분에 따라 아예 뒤풀이 장소도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보이지 않는 벽들에 화가 나면서 내 스스로가 오기에 발 동을 거는 기회로 삼았다.

 

중학교 시절 무례하고 버릇없는 덩치 큰 녀석을 손에 짱돌을 쥐고 후려 팼듯이,

 

오기에 발동이 걸리자 나는 다른 직원들 보다 몇 배의 노력과 함께 차별화된 일들을 찾기 시 작했다. 회사의 출근 시간이 아침 8시 30분이었지만 나는 항상 한 시간 일찍 출근했고 일이 많은 날은 6시 전에 출근했다. 토요일에는 오후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서 한 주일 동안 처리했 던 업무 중에서 혹시나 누락된 부분은 없었는지 재확인 하였다. 일요일 오전은 가족과 함께 근처 공원을 다녀온 후 오후에는 회사에 출근해서 최신 제품들에 대한 기술 자료를 수집하고 경쟁사 제품들에 대한 기술동향도 미리미리 숙지해 두었다. 일요일 오후는 직원들이 없어서 내가 무슨 준비를 하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타 부서의 원활한 업무협조를 위해서 관련 기술지원 부서의 책임자들과 진솔한 교류도 평소에 신경 또한 많이 썼다. 그래서 그런지 고객사에 장비를 납품하기 위해서 출고전표를 끊 으면 최우선적으로 납품을 할 수 이었고 기술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최단시간에 문제해결을 할 수 있었다. 한번은 신형 금융단말기 교체 건으로 회사가 온통 정신이 없었을 때, 

“최 과장님, 오늘 국민은행에 단말기 100대 꼭 내보내야 하는데 다른 은행들 납품분량이 만만 치 않아서 걱정이네요.” 했더니 자재과 최 과장은,

“조 대리, 걱정마. 내가 조 대리 물량은 미리 다 빼두었어.” 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금융결 제원 CD 공동망 시스템의 업무개선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기술지원이 급했는데 당 시 핵심기술 인력의 부족으로 갑작스런 고객의 기술지원 요청은 여간 난감한 상황이 아니었 다. 그러던 어느 날,

“ 조 대리, 금융결제원 김 과장인데, 요즘 CD 공동망 거래량 증거로 시스템 튜닝이 급한데 오늘 홍 과장 좀 보내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네...김 과장님, 오후에 홍 과장과 함께 방문하겠습니다.” 하고는 관련 부서에 전화를 했 다.

“홍 과장님, 저 조 대리인데요, 결제원에서 CD 공동망 시스템 튜닝 한다고 급히 좀 와달라고 하는데요, 이를 어쩌면 좋지요?”

“아. 네. 그래요, 사실 오늘 전국투자금융에 기술지원 나가기로 했는데요, 그 쪽 고객에게 양 해를 구하고 조 대리 요청사항부터 하지요.” 했다. 이렇게 관련부서의 업무협조는 필수였다.

 

뿐만 아니라 나는 고객을 챙기는 일에도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제품에 어 떤 하자가 생기거나 고객들이 방문을 요구해야 고객을 찾아가는 게 보통이었지만, 나는 회사 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담당하던 국민은행과 금융결제원은 일이 있거나 없거나 매일 찾 아갔다. 항상 고객들을 만나면 제품 사용에 대한 불만은 없는지 회사에서 능동적으로 챙겨야 할 일들에 대하여 내 스스로가 먼저 챙겼다. 꼭 최고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일하기를 좋아했다. 마당 쓸려고 빗자루를 들었으면 이왕이면 말끔하게 쓸어야 하듯.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나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는 날이 갈수록 탄탄해졌다. 그런 세월을 지 나다 보니 고객들은 우리 회사 임원보다도 일개 대리였던 내 말을 더 믿기까지 했다. 

“조 대리는 된다는데, 이 상무는 왜 안된다는거죠?”

고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상관에게 밉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 지만 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끔씩 몸살이 나거나 지방은행에 출장을 가서 고객을 방문하지 못하는 날은 고 객들부터 가슴 뿌듯한 전화를 받았다.

“조 대리,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안 오는데?” 

“조 대리 오면 점심같이 먹으려고 다들 기다리고 있어. 닭한마리 집에다 토종닭 좋은걸루 부 탁해 두었거든.” 

“오늘 우리 팀원들 닭 먹으러 가는데 매일 오다가 안 오니까 부장님이 궁금하다고 전화 좀 해

보래.” 

이렇게 나는 고객들이 챙겨주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물론, 내가 모든 고객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모 거래처의 경우 그들이 도입하려는 제품이 우리 회사 제품과 경쟁관계에 있었는지 김 과장은 나의 방문에 항상 경계를 하는 눈치였다. 제품도입에 관련된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다. 내가 점심식사를 권유하면 선약이 있다고 했고 그의 사무 실에서 커피 한잔 하는 시간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은행의 업무특성상 시스템 도입에 관한 구 매담당 과장은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래서 그의 협조는 필수적이었지만 그와 말조차 쉽게 꺼내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김 과장의 집 바로 옆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전세를 살았는데 재형저축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조그만 집 을 살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사하던 날 이삿짐을 들이는 내 모습을 보고는 김 과 장은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김 과장은 화장지와 세제 하나를 사 들고 우리 집에 왔다.

“조 대리, 내가 당신한테 졌다. 야... 지독하다 지독해. 이사까지 오다니”라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해왔다. 

그리고는 “자, 이젠 우리 이웃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라며 내 등을 두둘겨 주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는 이웃사촌이 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내가 궁금해 하는 경쟁사 제품에 대한 제안서와 가격정보 그리고 관련 제품들의 다양한 기술 자료를 집에서 받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남들과 다르게 차별화된 6년간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200명 영업직원들 중에서 매출실 적 1위를 달성하였고, 금융기관 기술영업을 통해서 고객들과 신뢰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금융전산망시스템 업무를 이해하고 숙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객들이 향 후 전산시스템을 어떻게 발전시켜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지, 무슨 애로사항들이 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고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이 나라 IT업계의 전반적인 기술발전 추이를 내다볼 수 있 는 안목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오기 발동으로 최단시간 내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관 련정보를 숙지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다. 현실의 벽을 뛰어 넘으려는 나의 이런 노력은 미 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IT 산업동향에 눈을 뜨며

 

내가 창업을 꿈꾸던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IT 분야는 하루가 다르게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프트웨어 분야의 산업이 아니라 땅을 파고 광케이블을 묻어서 초 고속망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과 하드웨어적인 장치산업이 대부분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획기적인 개선은 없었다. 그 당시부터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은 기술의 깊 이보다는 우선 당장 돈이 되는 게임과 같은 분야와 인터넷을 이용한 응용분야에 대부분의 관 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투자가들 역시 기술의 깊이보다는 반짝 돈이 되는 응용분야에 몰 리기만 했다. 

 

정부와 언론들 역시 오랜 세월동안 당장 돈이 되는 분야에 호들갑을 떨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나라는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하여 핵심적인 원천기술 확보는 꿈도 못 꾸게 되었다. 당시 국내 대형은행들이 사용하는 주 전산시스템은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한 IBM과 Unisys 등 메인프레임 급들이었고, 이들 제품에 탑재되는 소프트웨어 역시 모두 미국산이었다. 현실이 이러했기에 국산 소프트웨어의 제품은 전무하였고 핵심기술은 미국업체들에게 비싼 사용료를 지불하고도 빌려 쓰는 형편이었다. 

 

당시 미국산 금융단말 시스템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내에서 일정부분 국산화에 성공했지 만 핵심 분야에 대한 소프트웨어는 미국 제품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비참한 현실은 ‘갑’의 입장이었던 우리가 고액을 지불하면서도 매번 무시를 당해야만 했다. 어찌 보면 우리 스스로가 자초했던 불행한 현실들 이었다. 미국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선진 기술을 사용하려면 그들의 기술지원이 동반되어야 했기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고개의 업무개선을 위해서 기술지원을 요청하면 귀찮다는 듯이 거만한 태도였다. 미국 엔지니 어들 중에서 못된 친구들은 “이것도 몰라? 큰 종이와 연필이 많이 필요하겠다.”는 자존심 상 하는 말까지 했다. 이런 모욕은 구매고객인 은행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은행 들이 금융전산망 차별화 전략을 위해서 도입한 몇 백억 원씩 하는 고가의 대형 컴퓨터 대부분 은 미국산이었다. 고가의 제품을 구매해준 고객임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기술지원을 받기 위해 서는 미국 엔지니어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가끔씩 뉴스에서 우리나라가 IT 강국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드웨어적인 인프라 체제를 두고 자 화자찬하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전체 국토에 광케이블을 매립해서 초고속 네트워크 체제를 구 축한 나라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가 짧은 기간에 초고속망의 인프라 체제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국토가 크지 않았고 토건산업의 정부지원도 한몫했다.

 

뿐만 아니라,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빨리빨리’ 문화도 효자 노릇을 했다. 하드웨어에 대한 기 술발전이 워낙 빠르다 보니 개인용 컴퓨터나 휴대폰과 같은 제품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신제품 이 출시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제품이 나오기 무섭게 빚을 내서라고 사고 마 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신제품에 대한 베타 테스트 장소로서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앞서서 여러 차례 강조해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의 IT 분야는 부끄럽지만 하드웨어적인 인프 라와 소비적 측면에서는 세계 최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소프트웨어와 생산적 측면에서 조 금만 살펴보면 이 나라의 IT현실은 암담한 수준이다. IT 분야의 핵심인 소프트웨어 산업은 걸 음마 수준으로 미국에 비교한다는 자체가 민망스럽기 까지 하다.

 

가장 큰 핵심문제는 컴퓨터 운영체제(OS: Operating System)이다. 일반 개인용 컴퓨터에 사 용하는 운영시스템 체제부터 대형 컴퓨터에 사용하는 운영시스템 체제까지 전무한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데이터베이스(DB: Database) 분야 역시도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제품하나 없이 기술발전은 느림보 거북이 수준에 불과한 현실이다.

 

국가의 기간전산망시스템 또는 금융전산망시스템 같은 핵심 산업분야는 오라클(Oracle)이나 아이비엠(IBM),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등과 같은 미국산 데이터베이스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정상적인 작동을 하려면 운영체제와 데이터베이스는 가장 중요한 핵심기술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핵심이 되는 원천기술에 대한 기술개발에는 그동안 다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다. 우리는 머리로 먹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면 서도 가장 큰 부가가치를 실현하고 기술의 깊이를 다루는 소프트웨어의 핵심 산업에 대한 투 자는 늘 인색하기만 했다. 가난하기만 했던 인도가 오늘날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 던 것은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핵심요소 기술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감히 소프트웨어 산업은 우리들의 미래 세대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산 업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나라는 초고속망 인터넷 서비스 속에서 흥미위주의 온라인 게 임으로 매몰되고 있는 것 같다. 땅을 파서 묻는 광케이블 방식은 무선통신의 기술발전으로 그 수명은 오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현실이 이러했기에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원천기술을 확보하고자 나의 오기에 내 스스로가 발동을 걸게 되었다.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면서도 앞선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씁쓸했던 과거의 현실에, 이제는 그들을 앞지를 원천기술을 확보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나는 세계 최고의 제품개발을 위해서 우선 시장성이 풍부한 ‘비정 형데이터’ 분야를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시스템 운영체제와 상관없이 데이터베이스와 쉽게 연 동해서 고객의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널리 활 용될 수 있는 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본격적인 구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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