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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크너와 백남준, 그리고 태드 스투어톤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다-1

박운택(必立) | 기사입력 2013/04/02 [22:19]

부르크너와 백남준, 그리고 태드 스투어톤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다-1

박운택(必立) | 입력 : 2013/04/02 [22:19]

Imagine  
by John Lennon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Chorus)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Chorus)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해보려고 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죠
우리 아래 지옥도 없고
오직 위에 하늘만 있다고 생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 하루에 충실하며 살아간다고 상상해보세요
국가라는 것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그건 어려운 일도 아니죠
죽이는 일도 없고 목숨을 바쳐야 할 일도 없고
종교도 없다고 생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
당신은 날 몽상가라 부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나만 그런 것은 아니랍니다
언젠가 당신도 동참하길 바래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되어 살아가겠죠
소유물이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탐욕을 부리거나 굶주릴 필요도 없고
형제애가 형성되겠죠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반복 (*)



지난 토요일(3월 2일?) 오랫만에 귀를 씻으러 클라식 연주회를 찾았다. 클라식에 조예가 깊은 장 선생과 동행하는 첫 음악감상회라 일심 홀가분한 기분(모르면 물어보면 되니까)으로 템즈 필하모니 주 공연장인 ‘랜드마크’에 들어섰다.

주 공연곡은 부르크너 작품들로 구성돼 있었다. 부르크너? 들어본 듯도 하고 생판 처음 듣는 이름 같기도 하고….

바이올린 협연이 끝나고 잠시 휴식을 가진 뒤 그날의 메인 연주곡이 공연되기 시작했다. 객석을 가득 매운 청중들이 기침소리 하나 없이 집중하는 장시간의 연주 동안 아마추어 클라식 애호가인 필자는 내내 불편함과 그에 따른 장면이 연주가 끝날 때 까지 촉나간 형광등처럼 깜박거렸다.

평소 ‘음악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워야 한다.’라는 명제에 아무런 의심을 가진 적이 없던 필자는 예측할 수 없는 곡의 흐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관객들의 표정을 살필 수 밖에 없었다.

‘나만 이런가?’

여느 때보다 심오한 표정으로 음악에 빠져들어 보이는 관객들 표정에 다시 허망한 눈빛을 오케스트라 무대의 배경이 되고 있는 높은 천장으로 향한다.

거의 50미터가 넘어보이는 옛 교회 건물의 공연장 천장을 바라보며 ‘울림통 하나는 끝내준다.’ 하고 생각하던 중 음악과 함께 중첩되는 장면이 다시 슬라이드처럼 되살아난다.

공연이 끝나자… “박 선생, 음악 어떼요?”장 선생이 묻는다. 조금 떱떨음한 표정이다.

“악기 소리가 참 좋습니다.” 장 선생의 눈 빛을 피하며 답한다. 속으로야 ‘되게 어렵네요.’

“선곡이 잘못됐어요. 오늘 연주된 작품은 부르크너 작품 가운데 거의 연주되지 않는 곡들이예요. 적어도 청중을 생각했다면 한 곡 정도는 청중들에게 익숙한 곡이 있었어야 하는데…이 작품 초연 때 청중들이 다 빠져 나가고 부르크너 친구들 20여 명만 남아 있었답니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음악은 천 년 뒤에나 이해될 것 이라고 했다더군요. “

“그래요? 선생님 그거 아십니까? 공자 가라사대 최고의 음악 감상의 경지는 저 처럼 모르며 즐긴다. 두 번째 경지는 알면서 즐긴다. 제일 낮은 감상 경지는 연주할 줄 안다. ㅎㅎ”

“맞아요. 박 선생처럼 모르고 즐기는게 최고 경지죠. ㅎㅎ“ 장 선생은 나의 무식함을 여느 때처럼 감싸준다. 장 선생의 이러한 인품에 반하여 ‘시와 음악 동호회’를 만들자는 제안에 선뜻 동의 했었다.

무대 인사를 마친 템즈 필 유병윤 상임 지휘자가 무척 흡족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 부르크너 애호가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객석이 가득 찼잖아요.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 선생의 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나의 말

공연 뒤풀이로 템즈 강가 펍에서 몇 몇 단원들과 사담을 나눈 뒤 헤어져 집으로 오는 도중 여느 때 공연 감상과는 다른 느낌은 어연 일인가….

익산 촌놈이 미국이라는 땅에 도착해 처음 본 영화가 줄창 오토바이만 타는 영화였다. 반쯤 졸면서 보다가 마지막 허무한 장면에 퍼뜩 잠이 깨던 그 때가 떠오른다.

할리데이비슨이라나 뭐라는 오토바이가 나오는 그 형편없던 영화가 왜 오랫동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는지.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십 수년이 지나고 한국에서 상영된 그 영화가 세계 100대 영화에 드는 Easy Rider라나 뭐라나. ( 이 글을 읽는 독자가 20대라면 이 영화를 강추한다. 40 대 이상이면 볼 필요 없고)

 

부르크너와 백남준, 그리고 태드 스투어톤

공연장을 빠져나오고 두 세 시간 후면 어떤 곡조의 음악이었나 기억조차 가물 가물하던 여느 때와는 달리 리듬도 박자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던 부르크너 곡이 공연장을 다녀오고 나서 삼 사일 동안 머리를 휘저었다. 연주되던 악곡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연주 당시 깜박거리던 그 장면이 지워지지 않았다.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진술을 의심해 본 적이 없던 때가 있었다. 마치 ‘음악은 아름답다.’라는 것 처럼. ‘인류의 문명은 발전해 왔고 문명의 발전은 유익한 것.’또한…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스포츠 중계처럼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현대전 뉴스가 무덤덤해질 무렵 9.11 사건은 바벨탑 사건을 보는 착각을 일으켰다. 인간의 욕망이 쌓아올린 탑이 인간의 최고 기술이 만들어 놓은 비행기에 처박혀 무참히 불타 오를 때… 그 속에 갖혀 절규하는 사람들…방송 카메라로 현장 중계되는 상황에서도 너무 높은 건물이라 어떻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발만 구르는 군상들…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무능력을 통감해야 하는 상황…내 젊음의 등대가 되었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통해 가장 큰 감명을 주었던 에릭프롬이 거대한 빌딩과 함께 녹아내리고 있었다.

“굳모닝 레이디스 앤드 젠틀먼, 저는 이 비행기의 조종사 입니다. 10년 넘게 이 항로를 운행하며 오늘과 같은 날씨는 일년에 다섯번도 볼 수없는 장관 입니다. 비행기가 예정보다 빨리 비행한 관계로 30 분 동안 도시 상공을 선회하겠습니다. 덕분에 여러분들께서는 수 천미터 상공에서 구름 한 점 없는 이 도시를 감상하시게 될 것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씨애틀을 내려다 보시기 바랍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분기탱천 시작한 출판관련 사업을 보기 좋게 말아드시고(돌아가신 울 엄니 표현) 무작정 올라탄 것이 알라스카 행이었고 어쩌다가 씨애틀을 경유할 일이 발생했다.

80년 대 후반, 한국 출판계는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책들을  앞다퉈 쏟아내기 시작했다. 신작으로 출판되는 서적들을 예닐곱권 읽어대도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이 수 천 미터 하늘에서 씨애틀을 바라보는 순간 권총의 총알처럼 머리 속을 관통했다. 모더니즘조차 개념파악이 안된 채 포스트모더니즘을 잡으려 했던 지적 허영심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글 베스트로 이 글을 추천합니다. 누르시면 자동연결)
 http://www.paintseoul.com/Report-21c-09.htm

 

‘비평가는 천재를 팔아먹는 둔재들이다.

어떤 작가 혹은 시대에 이름을 붙여놓고 그 대상에 대한 형편없는 싸구려 말 펀치를 날리는 것이 비평가의 직업이겠지만 예술종사자들이 이들과 거래를 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둔재들의 입놀림에 따라 예술작품의 가격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한 예술쟁이가 아닌, 빌리어니어쯤 되는 예술가가 있다면 작품 값을 스스로 매길 수도 있겠지만.

왜 백남준의 이해 없이는 21세기 예술을 예측할 수 없으며 20세기 후반 예술품들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인가?

텔레비젼 몇 대 쌓아놓은 것이 미술사조를 바꿀 만큼 대단한 예술작품인가?

왜 현대 영화조차 백남준의 이해를 배경으로 삼아야 하는가?

여느 예술작품 감상보다도 백남준 작품 앞에만 서면 형편없이 초라해지던 나 자신의 모습, 자신의 박제된 모습을 티비화면을 통해 응시하고 있는 부처같다고나…만약 내가 백남준이라면 인류 문명의 몰락의 상징이라고 불려지는 9.11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려 했을까.

9.11 사건은 학계, 종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정신적 후폭풍이 대단했으나 유독 예술계만이 강 건너 불구경 식으로 그 사건을 대했다. 일부에서는 그런다. ‘영화 속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영화감독들이 찍을 것이 없다고.’ ‘눈앞에서 죽어가는 가족과 동료 앞에서 한없는 무능력을 자각했던 인간들이 무슨 선한 것을 만들겠다고.’ 

과연 그래서일까? 그들의 말대로 예술이란 대재앙 앞에서는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평생 공산주의자로 인류학에 헌신했던 레비스트로스가 예술활동을 인간 생활 가운데 가장 소모적 행동으로 비난해오다가  ‘인생에서 해볼 만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예술이라는 모험이다.’라고 말 한것은 죽음을 앞둔 백살 노인의 치매발언이었나?

21세기를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인  ‘다양성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비겁함을 겁 없이 지적하는 김관성 목사의 광야의 외침에 적극 찬성표는 던지고 있으나….객관적이고 절대적 진리 시대로 돌아가기 위해 암흑시대로 낙인찍힌, 기독교가 주름잡던 중세 때로 가자는 것 같기도 하고…(내 사랑하는 후배 김관성 목사의 특징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황제를 눈밭 속에 3일을 무릎  팍 끓혀놓던 교황의 권세를 탐낼 만한 배짱과 실력 있는 젊은 목사다.)

 

1969년 미국에서 발표된 EASY RIDER가 그로부터 30년 후인 1999년 한국에서도 개봉됐으나 ‘고래사냥’ 수준의(고래사냥이라는 영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 대부분이 개인의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 사회의 흐름을 바라보는 방식으로는 서툴고 서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영화에 익숙해 있던 한국 관객들이 소화해내기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적과 다른 이념무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생존수단이다. 반세기 넘게 남북이 적이 되어 총구를 겨누고 있는 현실 앞에서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를 모토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는 적의 이념까지 존중해줘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다. (사고의 유연성을 위해서도 남북이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가는 무능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섰기 때문에 외로울 뿐이다.-템즈’

부르크너 자신이 ‘본인 작품은 천 년 후에나 알아줄 것’이라는 말이 아직은 천 년이 안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는 주절거림으로 나를 안위한다. 현대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적으로 표현한 백남준의 미공개작품을 소개하는 것도 이 글을 읽는 재미가 될 듯하다.

 
법정과 같이 자발적 청빈함을 내세울 만한 분들이야 유명세라도 있지만, 나처럼 강요된 청빈함이 습관이 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제 분수를 안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다.
예술 작품을 집에 걸어둔다는 생각은 에당초 가져볼 생각조차 해본 적 없지만, 우연히 영국 땅에서 보게 된 백남준 작품을 보는 순간, '내 밑바닥에 물심이 작지안구나...'를 세삼 깨닫는다. 복사품마저 살 형편이 안되는 상황에서 원작품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말해주고 싶은 대목이다.

언뜻 보면 아이들 낙서 같은 그림, 영국 카부츠에서 보게 되는 5파운드면 살 수 있는 그림들보다 더 형편없이 그려진 작품이 왜 나의 물심이라는 야성에 불을 지폈는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마치 어떤 못 생인 여인을 첫눈에 보고 성욕을 느낀 것처럼…

익산 황등(나훈아의 고향역 배경 동네)출신이 시애틀 상공에서 내려다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머릿속을 관통하는 권총알이었다면 지인의 집에서 맞닥뜨린 작품은 내 가슴에 대포알 같은 시원스런 구멍을 뻥 뚫어 주었다.

인간의 최고 발명품인 언어가 스스로 그 권위를 무너뜨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각기관들이 별 볼일 없이 프로그램된 신경조직연결망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작품, 인간이 스스로 세워놓은 인간 자존의 허상을 어느 엑스레이보다 더 선명하게 담고 있는, 백남준의 다른 작품인 TV 부처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백남준의 유머를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보다 더 심장 떨리게 한 것은 그 배경에 자리한 엄격함으로 훈련된 노예술가의 숙명의 고독….인간의 문명에 대한 씁쓸함. 백남준은 9.11 이전 이미 수년, 아니 수 십 년 전부터 문명에 대한 예언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신의 대리인이었던 무당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세계를 본 자들의 예지능력이 인간사 오만 잡일에 일희일비할 수 없는 숙명인 탓이리라.

이제는 흔적조차 사라진 뉴욕 쌍둥이 빌딩 자리에 기념비 하나 세워두는 것으로 9.11에 대한 예의가 끝나는 것인가. 기억만으로도 아픈 사건이기에 ‘이제는 잊어야 할’ 대상이 된 것인가.

담배갑만한 것이 냉장고 가격보다 비싸다.. 아프리카 5인 가족 2년 치 식량비를 넘어서는 돈이 휴대폰 하나 값으로 2년도 안 되어 사라진다. 그 휴대폰을 수 억대씩 만들기 위해 공장은 돌려지고 그로 인한 배출가스로 기후변화는 아프리카에 가뭄을 가져오고…덕분에 그들은 굶주린다.


 

존 레논과 테드 스투어톤

2012년 런던 올림픽의 개막식에서 폴메카트니는 ‘헤이 주드’를 부른다. 폐막식은 물론 예상대로 ‘이매진’이 울린다. 서로의 애증으로 인해 해체해야 했던 비틀즈 멤버였던 존레논의 아들을 위해 만든 노래가 국가와 국가, 종교와 종교, 개인과 개인간 갈등으로 분열된 인류의 화합을 상징했다면 패막식장에서 불려진 ‘이매진’은 우리의 희망을 노래한 것이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관념이 아니다. 철저한 경험에 근거한 항해술이 없이는 방향마져 잡을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항해는 불가능하다. 해양국가인 영국은 그래서 경험주의 철학의 산실이 된다. 철학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와 국가를 지배한다. 덕분에 영국의 경험주의 사고는 미술분야에서도 그대로 표현된다. 영국의 국민화가로 알려진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노예선에 관련된 글은 아래 싸이트를 참조바랍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jwgal&logNo=140149043417

영국에서 유명 작곡가가 적은 것도 그렇고 추상화가보다는 풍경화가가 많은 것도 영국의 경험주의 사고가 대륙보다 강한 까닭이다.

이성과 합리성이 가치평가의 기준이 되어온,  현대 문명을 언급하는 모더니즘에 대해 이미 오래 전 예술가들은 그 한계를 지적해왔다. 경험주의의 관찰력이 문명에 대한 비판의 기침을 시작한 것도 바로 영국이다.

‘모던타임즈’를 제작한 찰리체플린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부르고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사회 현상에 대해,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비판과 고발만으로는 인류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이미 실패한 종교와 이념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 또한 무책임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문제지적에 따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인간의 무력감을 마취시키기 위한 현대판 판타지 세계로 몰려갈 수 밖에 없었다.

생명으로 생명으로

희미한 별 빛이 두꺼운 커튼을 뚫고 세어 들어온다. 어둠이 강할 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별빛들….< 테드 스투어톤의 Light Box 감상편>

흘러간 물로 물래방아를 돌릴 수 없듯이 이미 지나버린 종교나 이념으로 인류의 희망을 얘기하기는 설득력이 약하다. 영국이고 한국이고 아프리카고 남극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주제는 생명이 되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 또한 인류 공통분모는 생명이다.

영국 서남쪽 해변가 고성에서 그 생명의 씨앗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닌,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오래 전 프로그램 되었다면?


▲백남준 미공개 작품     © GoodMorningLonDon
▲백남준 미공재작품 뒷면     © GoodMorningLonDon
▲  테드 스투어톤 작   ©GoodMorningLonDon


<제 2편- 영국 화가 테드스투어톤>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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