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고뭉치 아들을 둔 아비가 있었다. 아비는 그 아들이 사고를 치고 돌아올 때마다 나무 기둥에 못을 박았다. 그 아들이 장성하여 하루는 나무기둥에 가득히 박힌 못을 보았다.
“아버지, 저 못들은 뭐 예요?”
“응, 그것은 네가 자라면서 죄를 지을 때마다 못을 하나씩 박은 것이다. “
그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비가 말했다.
“이제 네가 어른이 되었으니 저 못을 빼도록하렴. 착한 일을 할 때마다 하나씩….’
나무기둥에 박혀 있던 많은 못들은 세월이 지나며 하나씩 뽑혀져 나갔으나 못이 박혀 있던 흔적은 없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예수 앞으로 간음한 여인이 끌려왔다. 성난 군중들은 예수에게 따지듯 물었다.
“율법에 ‘간음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여라.’ 라고 했는데 이 여인을 어찌할까요?”
예수는 방금이라도 돌로 여인을 쳐죽일 듯한 군중들의 말에 아무 대답없이 쭈그려 앉아 땅 바닥에 글을 썼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성난 군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러자 손에 돌멩이를 들고 간음한 여자를 빙 둘러 서있던 군중들이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 신약성경 중에서….
세월 좋은 사람들은 이 대목을 각양각색으로 풀이한다. 자기만의 양념을 쳐가며… ‘예수가 아람어를 썼으니 아람어로 썼을 것이다.’ ‘아니다. 예수도 당시 로마인들이 썼던 언어를 사용해서 썼을 것이다. ‘유대어로 썼을 것이다.’ 등등
한국어로 쓰면 어떻고 중국어로 쓰면 어떤가.
왜 썼는가
왜, 무엇을 썼는가가 중요하지 않은가? 그 대목에는 성경풀이가들의 한가로운 상상력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자리도 없다.
‘쓰다.’라는 행위는 ‘기록하다’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기록은 남겨져 후세에 전해짐을 목적으로 한다. 예수가 땅바닥에 글을 쓰고 나서 침을 ‘탁’ 하니 뱉고는 자신의 발로 쓱쓱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쓰다,혹은 기록되었다, 라는 사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들이 착한 일은 한 후에 못을 뽑았어도 박혀 있던 자리가 남아있듯…돌로 치려 했던 사람들이 사라져 네가 용서를 받았을지라도 네가 간음한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썼을까?
그녀를 잡아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요즘말로 목사와 장로들)이 계속해서 예수의 답변을 채근하자 예수가 계속 땅바닥에 글을 써내려 간다. 이 대목에서 예수가 무엇을 쓰겠는가. 부모님 전상서 편지를 쓰겠는가 아니면 시를 쓰겠는가? 당연 간음한 사건과 관련된 현장 리포트 아니면 쓸 내용이 없다. 그 상황을 간음한 그 여인도 보고 둘러섰던 군중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한복음 8:7-9
방금 전까지 돌멩이로 내려칠 기세의 사람들이 가책을 느꼈다? 과연 그럴까? 간음이란 혼자서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분명 현장에서 잡혔다 했으니 상대 남자가 있을 터. 그 남자는 어디가고 여자만 쳐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분명 그 놈 또한 군중들 무리에 끼어 돌멩이를 겨누고 있었을 …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는 계속해서 이 길거리 재판 현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간음한 여자는 누구이며 어떤 자가 돌멩이를 몇 개 던졌는지 누구의 돌멩이가 이마를 정통으로 맞춰 간음한 여인을 절명케 할 것인가를 기록 대기 중이었다. 그 현장에서 어떤 배포 큰 놈이 돌멩이를 던지겠는가.
‘예수를 믿으면 주홍 같던 내 죄가 백옥같이 희어질 것이요.’하는 기독교인들이 손뼉치며 부르는 노래가 있다. 희어는 지겠으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이미 기록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 기록을 삭제하고 안하고는 내 관심밖의 일이고…죄 기록 삭제가 괜찮은 비즈니스였던 것을 오래전 유럽에서 시전했던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