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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현 기사입력  2014/04/28 [06:58]
꽃이 꽃으로 서 있는 까닭에 접근하고 있는 박영숙의 꽃
2014 굳모닝런던 초대전 초청작가- 박영숙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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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많은 시인이 꽃을 노래하고 더욱 많은 미술가가 꽃을 그렸다. 이렇게 예술가들이 꽃을 기웃거린 것은 그것은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단 하나의 몸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꽃은 천의 얼굴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몸짓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사실 꽃의 몸짓에 기웃거리며 그것을 모방했을 뿐이다.
   꽃잎은 고대 원인류가 아름다움을 알기 전에 이미 그것의 신비를 알아챈 존재의 유일한 흔적이다. 식물들은 여자보다도 먼저 교배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들의 성기를 꽃으로 발달시키며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수 백 만년 이상을 진화하며 스스로 꽃이 된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이름을 불러주기 전이 아니라, 사람이 언어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 전에 이미 꽃은 꽃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오늘날의 아름다움으로 스스로 무장하고 존재의 의미도 물론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꽃은 꽃이었다.
   꽃잎이 보잘것없으면 향기를 지니려 노력해 그것을 얻고 향기마저 없으면 군락을 이루며 모여 벌과 나비를 불러모으며 생존을 도모했다. 꽃은 연약하게 보이나 사실은 전투적이고 꽃은 부드럽고 화려하게 보이나 그 이면 속에는 처절한 삶의 흔적이 고여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꽃을 기웃거리며 그 자태를 훔쳐오고 그것에 취해 노래하는 것이다. 여인들이 꽃에 쉽게 유혹을 당하는 것은 그것의 본질적인 생명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꽃을 기웃거리며 사실은 모두 스스로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도 꽃을 기웃거리며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위 시처럼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비로소 꽃이 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꽃이 꽃처럼 서 있는 까닭과 같이 능동적 존재성을 부여받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미 나이어야만 한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어 내가 된 것은 정말 아니어야만 한다. 만약 타인의 의미로 그 존재가 부여되고 삶의 가치성이 얻어진다면 그것은 정말 비참한 삶이다. 항상 남의 시선이나 의견에 흔들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혼자가 두려워 능동적인 꽃을 기피한다. 그래서 홀로선 그들의 존재가치를 죽이기 위해 꽃을 꺾어 그것을 자신의 몸에나 실내로 가져와 분리를 시도하는지도 모른다. ‘김환기, 천경자’의 꽃이 그렇고 ‘도상봉’의  꽃이 그렇다. 대부분 미술가들은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수동태의 꽃을 지향하고 그것을 끌어다 펼쳐 놓는다. 
  
▲  김환기 作  © GoodMorningLonDon
▲   도상복 作  © GoodMorningLonDon
▲ 천경자 作 길례언니 1972    © GoodMorningLonDon


<꽃의 홀로선 존재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수동태로 꺾어진 꽃을 장식적 소재로 사용한 그림들, 김환기, 도상봉, 천경자 (위로 부터)의 꽃 그림을 통하여 우린 근대적인 시각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사람들은 꽃을 꽃으로 보지 못한다. 위 구시대의 화가들처럼 수동태의 낡은 방식으로 보고 함께 공존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꺾어진 꽃들이나 병에 꽃아놓은 것이나 주변을 장식하는 것으로 사용할 뿐이다.
  꽃을 꽃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관계로 그것을 엿보기를 시도하며 나타난 그림들이 이들보단 20년 혹은 30년 후에 나타난 ‘이대원과 이왈종’의 그림이다. ‘이대원’은 자연대상 속에서 꽃의 의미를 드러내고 이왈종은 그 관계성에 꽃의 존재를 찾고 있다. 아래 그림 속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이대원은 주로 산과 들에 핀 자연 속에서 드러난 꽃을 화려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해 이왈종은 꽃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하고의 관계 혹은 자기하고의 관계성을 성찰하고 그것을 엮어내고 있다. 
  
▲ 이대원  作    ©GoodMorningLonDon
 
▲  이대원 作   ©GoodMorningLonDon
 
 <이대원은 자연 대상 속에서 꽃의 존재를 전체 화면으로 확장하며 드러내고 있다.>
 
▲  이왈종 作   ©GoodMorningLonDon
 
▲이왈종 作     © GoodMorningLonDon
<이왈종은 꽃과의 관계로 접근하고 그것을 전체 이미지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들의 그림을 통해선 모더니즘의 시각이 무엇인가 사색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

  위 그림에서 보듯 이대원은 자연 대상 속에서 꽃의 존재를 전체 화면으로 확장하며 드러내고 있다. 이왈종은 꽃과의 관계로 접근하고 그것을 전체 이미지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이들의 수동태적인 접근은 사물이나 대상 자체에 존재성을 피하고 관계에서 파악하거나 아니면 전체를 위한 부분품, 소품으로 파악한다. 천경자나 김환기가 그림의 주제 혹은 실내를 위한 장식으로 사용한 것처럼 그것들은 장식적 요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오랜 아카데미 미술의 전통이었고 모더니즘 미술이 시작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묘사 방법이었다.
   이에 반해  능동태 적인 접근으로 사물과 대상에 예술성으로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후기구조주의적 미술에서 흔히 보이고 있는 접근 방식이다. 단순한 사물, 무형체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과 같은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대원과 이왈종’은 모더니즘의 전환기에서 보는 사물의 관점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사실은 낡은 방법이고 전통적이고 구태의연한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아카데미 미술이나 일반 대중을 위한 키치 미술을 위해선 이들의 존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누구의 꽃이 후기모더니즘의 꽃인가?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작가들 속에선 오늘의 꽃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후기 구조주의적인 시각은 아니지만 ‘김종학과 박영숙’의 꽃은 꽃이 꽃으로 서 있는 본질에 더욱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기대고 있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김종학은 내이브 아트의 순수성에  기대 자기의 꽃들을 펼쳐놓고 있고 박영숙은 꽃의 근원적 생명성과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시비가 개재될 수도 있다. 그것은 나이브 아트의 시대성으로 모더니즘이 전개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이브 아트는 시대 미술사상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본질에서 나온 미술행위 임을 우리는 반드시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
  
▲   김종학 作  © GoodMorningLonDon

▲ 박영숙 作    ©GoodMorningLonDon
 

 
 
 
 
 
 
 
 


‘김종학’은 위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시각적 이미지에 화려한 속성을 보여주고 있고 ‘박영숙’은 꽃이 왜 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접근하며 꽃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까닭으로 ‘김종학’의 꽃들은 기교가 배제된 과감하고 거친 선들과 원시성의 순박함과 함께 그들의 외면적 생명성이 엿보인다.

▲  김종환 作   © GoodMorningLonDon
▲   박영숙 作  ©GoodMorningLonDon

 

 

  
 
 
 
 
 
 
 
 그러나 박영숙의 꽃은 다르다. 그 꽃들은 교배를 위하여 어떤 몸짓을 기다리고 있는 것, 막 피어나 누군가의 손 길을 기다리고 있는 꽃이 아니다. 그녀의 몸짓은 절정에 오른 교배 중인 꽃의 문질러진 얼굴이다.
▲ 박영숙 作    © GoodMorningLonDon

 그녀의 꽃에는 김종학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교태가 아니라 오르가슴으로 자지러진 나르시즘의 결정적인 얼굴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물론 교배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몸짓도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꺾여져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수동태적 몸짓도 아니다. 하나의 완벽한 몸짓으로 은밀한 손길이 이미 만나 생명의 향연이 시작된 순간이다. 
   그리고 꽃잎은 그 존재를 망각하고 본질성에 함몰된다. 그녀의 그림은 꽃이 주는 오르가슴의 순간을 정직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꽃들의 외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꽃들이 어떻게 섹스를 하는가를 보여줌으로 우리 삶에 오르가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풀어놓고 있다. 꽃의 작업은 생명의 작업이다.  그녀는 완벽하게 자신의 작업으로 이 생명의 잔치에 우릴 초대하고 있다. 
  전하현 <미술사가, 평론가>


2014 Good Morning London 한국 작가 초대전
일시: 2014 6월 11-14일
장소: Landmark Arts Centre Ferry Road Teddington TW11 9NN
www.landmarkartscentr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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