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모닝런던을 시작페이지로
BBC CBeebieslive LearningEnglish BBC school BBC local Congestion HSBC Daum Naver Google 핫메일 다국어성경 Amazon Audio Treasure 성경찾기 유투브 Eday 영국벼룩시장

중용((中庸) 핵심 분석-1

시대적 배경

박운택(必立) | 기사입력 2013/07/25 [13:58]

중용((中庸) 핵심 분석-1

시대적 배경

박운택(必立) | 입력 : 2013/07/25 [13:58]

[중용]은 송()나라 때 성리학의 대가인 주희(朱熹 1131-1200)에 의해 <논어>,<맹자>,<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동양철학의 근간이 되는 <<사서>>(四書)에 오를 정도로 격()이 높아져 20세기를 넘어서 지금까지도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이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중용의 핵심을 분석하기에 앞서 근 천년전 주희가 중용을 해석하며 썼던 [중용장구] 서문 가운데 한 구절로 글을 시작한다.

 

熹自蚤歲 卽嘗受讀而竊疑之 沈潛反復 蓋亦有年一旦 恍然 似有得其要領者

然後 乃敢會衆說而折其衷旣爲定著章句一篇以俟後之君子

...(중략)...淳熙己酉春三月戊申 新安朱熹序

희(여기서는 주자 자신)는 어려서부터 이 책을 읽으며 마음속에 의심을 품어 그 뜻에 대해 침잠반복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그 뜻을 푸는 요령이 생겼다.  이 후 여러사람의 얘기를 모아서 가다듬어 글 한 편(중용장구)를 지어 뒤에 오는 군자(학자)의 비평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주돈이, 정호, 정이 등 성리학의 법통을 잇는 주희가 환갑을 바라보는 58세(1189년) 까지 학문적 의심을 풀기위해 침잠반복하다가 깨달음이 아닌 요령을 터득한다?

요령이라 함은 자신의 학문적 족보가 아닌, 전혀 다른 학문적 접근 방법을 의미한 것일 터.

주자가 얻게 된 새로운 학문적 시각은 무엇일까?

타임머신의 시간여행을 천 년 전으로 맞춰보자.

주희가 태어나기 정확히 50년 전 1081년 10월, 송나라 수도인 개봉(開封)에는 한 떼의 비잔틴 황제 사절단들이 들어닥친다. 이들 사절단은 미카일 7세가 통치하던 때 출발했으나 당시 국제정세의 불안정으로 인해 여행기간이 늘어지더니 수 년 동안의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개봉에 들어설 수 있었다.

元豐四年十月其王滅力伊靈改撒始遣大首領你廝都令廝孟判來獻鞍馬刀劍真珠言其國地甚寒土屋無瓦產金西錦獨峰駝千年棗巴欖以蒲萄釀酒樂有箜篌壺琴小篳篥偏鼓王服紅黃衣以金線織絲布纏頭歲三月則詣佛寺坐紅床使人舁之貴臣如王之服或青綠緋白粉紅褐紫並纏頭跨馬城市田野皆有首領主之每歲惟夏秋兩得奉給金以治事大小為差刑罰罪輕者杖數十重者至二百大罪則盛以毛囊投諸海不尚鬥戰鄰國小有爭但以文字來往相詰問事大亦出兵鑄金銀為錢無穿孔面鑿彌勒佛背為王名禁民私造。  < 宋史卷四百九十  列傳第二百四十九 外國六>

온갖 보석과 왕들이 입는 옷처럼 화려한 색깔로 치장한 사절단들은 외양과는 달리 이들의 심정은 바짝 바짝 마르고 있었다.

이들이 개봉에 도착하기 10년 전, 1071년 8월 26일, 지금의 터키 말라즈키르트(Malazgirt)에서 벌어진 전투(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에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황제가 포로가 될 정도로 셀주크 투르크 제국 앞에 비잔틴 제국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부랴부랴 금은 보석을 잔뜩 짐지워 셀주크 투르크와 오랜 대적관계에 있다는 동양의 송나라를 찾아 사절단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 장도의 길에서 수 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느라 이들이 처음 출발할 때 준비했던 예물들은 거의 빼앗겨버리고 겨우 남은 몇 몇 보석을 팔아 송나라 수도에 들어서기 전에 사절단의 체면치례용 선물이나마 마련할 수 있었다.

동로마 황제의 낙인이 찍힌 외교 문서가 송의 황제 앞에 펼쳐지자 송 황제궁은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지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대제국의 설계도가 눈 앞에서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비잔틴 제국과 송나라가 연합하여 세계를 양분하자는 어마어마한 계획서였다. 수 십년 동안 유럽의 국가들이 준비한 전쟁 예상도가 상세히 그려진 지도 앞에서 송 황실은 극한 혼란에 빠지고 만다. 비잔틴과의 연합파와 비연합파가 대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얼마 못가 비연합파의 승리로 끝이 난다.

당시 송나라는 요나라와 서하 등 송()을 위협하는 외민족들과 재물을 주고 산 평화가 지속됨에 따라 흘러넘치는 재화와 높은 문화에 익숙해진 기득권자들이 또 다른 이민족들간의 싸움에 끼여들고 싶지 않은 것이 주 원인이겠으나 지주와 상인계급들이 중심이된 이들 기득권자들이 영세민 보호와 대지주, 대상인을 억제하려는 왕안석파를 견제하기 위해 비잔틴과의 연합을 반대했던 주 원인으로 풀이된다.

어쨌거나 송나라와의 연합 동맹군 협상에 실패한 비잔틴의 외교사절이 빈손으로 돌아가고 10여년이 흐르자, 송의 신종(宋神宗)황제 앞에 펼쳐졌던 대전쟁 지도가 실제로 유럽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전개된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간의 십자군전쟁(1096년-1291년)이 유럽사를 통째로 바꾸는 결과를 낳을 때 동아시아 또한 전쟁으로 인한 급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문명을 자랑했던 송나라가 황제 흠종(欽宗),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 두 부자가 금나라에 끌려가 치욕스런 삶을 마감한 정강의 변(靖康之變) 이 후, 흠종의 동생 조구(趙構)가 1127년 임안(현재 항저우)에서 남송을 세우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주희가 태어난다.(1131년)

금나라와의 평화적 외교관계를 유지해오던 효종이 퇴위하던 1189년이 주희가 [중용장구] 서를 쓰던 해였다. 대책없던 주전파 일원이었던 주희 또한 1195년에는 정치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자신이 이룩해놓았던 주자학((당시에는 도학으로 불림)도 탄압을 받기에 이른다. (경원위학지금)

돈 주고 산 위태로운 평화를 즐기던 남송 또한 불과 150년만에 몽고가 새운 원나라에 멸망을 당하고 만다.

이러한 급변의 시대를 살았던 주희가 환갑을 목전에 두고 어느날 창졸간에 깨달았던 학문의 새로운 요령은 무엇이었을까?

주희가 겪었던 인간 군상들의 무의미함의 연속선에서 새로운 안목을 열어준 것은 서양의 소식이 아니었을까? 20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서양에서의 전쟁이 송나라에 들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저들이 수 백년을 목숨걸고 싸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의 신은 어떻게 생겼는가? ‘

이미 당나라 시절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수도 장안에서 황제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과 이슬람이 한뿌리의 신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200년 넘게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 신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것도 식자층 사이에서는 당연히 화젯거리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통치세력의 지배수단으로 전락한 유교를 불교와 도교 수준으로 철학화 시키지 않고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발전해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주희는 기독교에 등장하는 신의 개념을 유교속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한다.

공자 이후 수 천년을 지나며 원형이 상실될 대로 상실된 중용에서 그 핵심을 추려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공자시대의 중용이 정치세력의 입맛에 따라 편집되었기 때문에 중용 해석은 그 핵심 글자를 중심으로 풀이하려 한다. 그것이 어용학자들이 심어놓은 지뢰밭을 통과해서 중용의 본 뜻에 도달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