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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택 기사입력  2012/03/29 [19:02]
템즈강 웃마을 킹스톤 나들이
테임즈강 상류마을 킹스톤 ( Kingston upon Thames)-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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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유한준(兪漢雋)

박운택이라는 한국 이름이 있는데도 굳이 영어 식으로 들리는 필립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두고 조그마한 동네에 말이 많다.  한국에서 사고를 치고 영국으로 도망해와서 이름을 감추고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오해도 말 많은 동네에서 있을 법하다.

이역만리 영국 땅에 살면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명절 때가 되어도 어머니 산소를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함자는 반드시 필()자에 옥()자를 쓰셨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나이 40이 넘어 스스로 호를 지었다. 어머니 가운데 함자인 필자를 넣어 짓다 보니 반드시 필()에 세울 립()을 쓰게 되었다.

오강 선배 말마따나  개인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필립이라 이름을 지었더니 다른 사람들이 쉽게 기억해줘서 좋다.

내가 살고 있는 영국에 대해 살면 살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다. 우선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곳부터 차례로 돌아보는 것도 영국을 사랑하게 되는 첫 걸음이 될 듯하다. 거창하게 영국을 사랑할게 아니라 뉴몰든 그리고 킹스톤, 윔블던 등 주위의 사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것이 사랑의 파문을 넓혀가는 길인듯도 싶다.  맘 맞는 독자분들과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우리동네를 구석구석 찍어보는 것도 과한 욕심일련지… 영어로 써진 표지판을 겨우 해독하는 수준의 내 짧은 외국어 실력으로 고견의 독자제위께 무례함을 저지르지 않나 자못 망설여진다. 그래도 혹 이 정도 풀이라도 도움이 될 분이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무례함을 잠시 덮어두기로 하였다.

킹스톤은 런던에서 [로얄 바로우 오프 킹스톤 어판 테임즈] 이라는 다소 긴 이름을 가진 주요한 거주지역이다. 공장지대나 농장지대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 긴 이름은 ‘테임즈강 윗마을에 있는 왕실이 지정한 자치지역’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어쨌거나 이 오래된 장터가 있는 마을에서 섹손시대의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했다니 그 이름이 짐작이 간다(짐작은 짐작으로 끝나는 때가 많다.) 런던 차링크로스에서 남서쪽으로 10마일 떨어져 있는 이 도시는 런던 발전계획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는 주요 10개 도시 가운데 한 곳이다.

이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슬슬 킹스톤 산보를 떠나보도록 하자.

<역사>

▲     ©GoodMorningLonDon


▲     © GoodMorningLonDon                Coronation Stone


킹스톤을 상징하는 대관식 돌, 이제는 시청 안마당에 잘 모셔져 있다. 돌 위에 앉아 대관식을 거행했다기 보다는 왕을 뽑을 때 저 돌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뽑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스콘석(Stone of Scone)이라는 지금은 스코틀랜드 원위치에 보관된 잉글랜드 왕들의 대관식 돌 또한 돌 양쪽에 손잡이까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필자의 주장도 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한국으로 치면 들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The Stone of Scone  지금도 영국의 대관식 때 사용되는 돌 그 무게는 대략 336 pounds (152 kg)이다.
▲    들돌을 들어올려 장정임을 입증함으로써 온전한 품삯을 받을 수 있었다.


킹스톤은 런던브리지 다음으로 테임즈강을 건너는 가장 최초의 다리가 건설된 곳이고 지금도 그 다리는 처음 세워진 곳에 튼튼하게 버티고 서있다.

 킹스톤은 로마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나중에 왕실과 왕실 소유지가 되었다. 838년 이곳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당시 그 회의에는 잉글랜드 전역의 최초의 왕이었던 웨식스의 에그버트왕이 자신의 아들인 웨식스 에텔우프와 참석하였다. 

 이 회의기록은 Kyningestun famosa illa locus라는 오래된 영어로 기록되었는데 tun, ton, 혹은 don은 농장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킹스톤이라는 이름은 왕의 농장쯤으로 해석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7명의 섹손 왕들이 커다란 바위에 앉아 킹스톤에서 대관식을 거행해옴으로서 그 대관식은 전통이 되었다.

대관식 때 앉았던 대관 바위가 지금도 킹스톤 시청 마당에 서있다. 이러한 섹손왕들의 대관식이 이 마을 이름을 ‘왕의 돌’ 이라는 식의 킹스톤이라고 붙였다는 소문도 있으나 그것은 838년의 회의 기록은 왕의 돌이 아닌 ‘왕가소유 영지’로 해석되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고 왕들이 앉아 대관식을 거행했다니 킹스톤, 곧 왕의 돌이라 불리는 것도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닐들 싶다.

어쨌거나 1066년 노르만들이 정복한 이후 킹스톤은 이전의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킹스톤에서는 더 이상 왕가의 대관식이 거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2세기 킹스톤은 도회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으나 이 12세기 때 왕은  킹스톤 지역 사람들이 어떤 권리를 가졌다는 서류인 특허장을 주었다. 그것은 많은 특허장 중에서 가장 최초의 특허장이다. 존 왕은 1200년과 1208년에 킹스톤에 특허장을 주었다. 이 특허장은 시의 문서보관소에 보관돼있다. 에드워드 4세는 1481년에 킹스톤을 자치구로 지정하는 특허장을 주었다. 
▲     ©GoodMorningLonDon

 <킹스톤을 자치구로 인정하는 연어 세 마리가 그려있는 문장. 중요한 공문에 이 문장이 찍히게 된다. 정복 왕 윌리엄 시대인 1086년 간행된 둠스데이북에 당시 테임즈강 킹스톤에는 연어 양식장이 세 곳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연어 세 마리 밑에 씌여진 K 혹은 R 이라는 글자는 왕실을 상징한다.-이 밀납 인장의 원판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영국내에서 바로우, 곧 자치구라는 이름을 쓰는 곳은 윈저 앤드 매이든헤드, 켄싱톤 앤 첼시 ,카메폰 그리고 킹스톤 모두 4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킹스톤 공식 이름이 '로얄 바로우오프 킹스톤'으로 불린다.

20세기 들어서 킹스톤은 주요 군 비행기 제작 중심지가 된다. 당시 만들어진 비행기들 사진을 보는 것이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나을 듯하다.

 
▲ Hawker Hunter WT745 -Kingston-Upon-Thames factory에서 1955년 만들어진 1인승 전투기

킹스톤은 국회로 사람들을 보내 무거운 세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탄원을 지속적으로 하게된다. 킹스톤은 1835년 자치도시법에 의한 자치도시 중 한 곳으로 재편성되어  1963년 런던시 통제를 받을 때 까지 그 자치구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여 왔었다. 그 이후로는 이름만 자치구 일뿐 런던 바로우 오프킹스톤 어판 테임즈(런던관할 테임즈 윗동네)로 합병되게 된다.

1086년 토지 및 가축 조사인 둠스데이북이 나올 당 시 킹스톤에는 곡식을 찌어 밀가루를 만드는 5개의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 기준에는 조그맣겠으나 당시 기준으로 보면 방앗간이 다섯 개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 꽤 큼지막한 도시였을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으나 아마 1,500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농작물 재배와 양털을 얻을 양을 키우며 테임즈 강에서 연어를 잡으며 생활했다.

킹스톤은 내륙 오지에 있는 나루터였다. 그 당시는 육지로 물건을 수송하는 것보다 물길로의 수송이 훨씬 싸게 먹혔다. 테임즈강은 오늘날 런던에서 이어지는 고속도로 같은 동맥구실을 했다.

킹스톤은 주말 장터가 있었는데 13세기부터 이 장터는 열렸었다. 중세시대 장터는 시장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1년에 한번 밖에 열리지 않았고 이러한 장터는 넓은 지역에서 장사꾼들과 손님들을 끌어들였다. 1351년에 왕이 두 번째 시장을 열도록 허락했다.

킹스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런던에 들어가기 전 다리가 있는 마지막 장소이기 때문이다. 1263년에서 1265년 사이 킹스톤은 여러 번 불타고 강탈을 당했다. 또한 이 지역은 홍수로 고생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마을은 융성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킹스톤


킹스톤 중심부는 소매상점들로 북적거린다. 킹스톤은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 못 가는 곳만 빼놓고는 다 연결이 된다. 고급 상품을 파는 상점과 백화점이 위치해 있어 영국에서 쇼핑하기 좋은 곳을 꼽으라면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희한하게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옆으로 줄지어 자빠져있는 빨간 전화박스들이다. 이것은 못쓰는 전화박스를 눠놓은 것이 아니라 분명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진 일명 ‘고장난 것’들이라고 불리는 1988년 데이빗 마치가 설치한 조각품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고장 난 전화박스들 옆에 있는 화장실 갤러리 이다.
킹스톤에 있는 두리드 헤드는 18세기 밀크주를 만드는 첫 번 째 술집으로서 악명이 높다.

킹스톤 1500-1800 역사 

1513년 로랄드 교회와의 갈등으로 이단자로 지목되어 화형당함

1520년 울시 대주교에 의해 햄튼 코트 궁전 건설. 이로인해 궁전의 많은 사람들이 물품을 킹스톤에서 구매하게 됨. 

1561년 그래머 스쿨 설립 

1625년과 1636년 페스트 발병. 이 당시 맥아제조와 양조술 발달 . 가죽 가공산업 시작. 
         목제 킹스톤에서 런던으로 테임즈 강 통해 운반됨. 세 번째 시장 열림

1642년  왕과 의회 싸움 일어남 

 
근대 킹스톤

1833년 가스등 설치

1836년 킹스톤 경찰서 설립 

1838년 철도 가설

1840년 시장건물 건설

1841년 인구 8,000명

1855년 도로 포장

1864년 수도관 매설

1893년 전기공급

1897년 빅토리아 병원 건립 

1901년 철도연결로 인해 인구 폭발적 증가 철도 가설 당시1838년 8,000명 선에서 37,000명으로 증가. 19세기 초 서비튼은 조그마한 동네였으나 역이 생기게 됨으로써 붐이 일어남 1880년대 인구 10,000명 넘어섬
 
1935년 시청사 건립 -1875년 당시에는 말이 크는 버스 운행 1906년부터 전차운행 됨. 이러한 전차 1931년 버스로 대체됨. 

1979년 에든 오크 쇼핑센터 오픈 

1987-1992년 벤톨센터 건축됨 

1987-1992년 벤톨센터 건축됨

현재 킹스톤 인구 147,000명 가운데 12% 인 15-16,000여 명의 한인들로 어림된다. 이들가운데 5-6,000명이 시민권자로 영국정부는 추정하고 있다. 다음편으로 유럽유일의 한인촌인 이곳 킹스톤 지역의 뉴몰든을 소개하려 한다

킹스톤 관련사진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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