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사용한 올챙이 글자는 어떻게 생겼는가
과두문자(蝌蚪文字) 그 비밀을 벗겨보다
박운택 | 입력 : 2011/09/04 [18:00]
과두문자(蝌蚪文字)를 논하기에 앞서 한자의 서체를 먼저 살펴봄이 바른 순서가 될 것이다.
고문(古文): 전서가 성립된 이전의 서체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인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을 위시하여 은·주 고동기(古銅器)의 명문(銘文) 및 공자시대인 춘추전국 시대 사용되던 글자들까지를 망라하여 고문이라 하였다.
전서(篆書): 중국 주(周)나라 의왕(宜王) 때 태사(太史) 주(姝)는 갑골(甲骨)·금석문(金石文) 등 고체(古體)를 정비하고 필획(筆畵)을 늘려 대전(大篆)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후 진(秦)나라 시황제 때 재상 이사(李斯:?∼BC 208)는 대전을 간략하게 한 문자를 만들어 이제까지 여러 지방에서 쓰이던 각종 자체(字體)를 정리·통일하였다. 이것을 소전(小篆)이라고 한다.
예서(隸書): 전서에는 많은 회화적 요소가 남아있기 때문에 국가 실무를 관장하는 관리들이 전서를 사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전서는 글씨를 쓴다는 것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에 가까왔기 때문에 진나라의 옥리(獄吏) 정막(程邈)은 실무에 편리한 예서를 지어 전서의 회화적 요소를 배제한 직선적 글자체를 확립하였다. 하급관리들이 사용했다 해서 예서라 불린다.
초서(草書): 예서 또한 많은 기록물을 작성해야 하는 실무 현장에서 사용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다. 그래서 실무자들은 신속한 필기체로 실무를 기록하고 나중에 다시 정서체로 표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초서는 속기체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제 3자가 해독하기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행서(行書): 극단으로 단순화된 필기체인 초서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제 3자도 오해의 소지가없도록 좀더 획순을 더한 서체가 행서이다.
해서(楷書): 다른 서체보다 발생단계가 가장 늦게 성립된 서체로 필획의 생략이 없는,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활자체이다. 중국에서는 해서를 단순화시킨 표기법이 사용되고 있으나 한국은 지금도 해서의 정형을 따르고 있다.
예서로 기록된 금문상서(今文尙書)
한(漢)대에 들어서면 이미 공자의 가르침이 일개 학파의 경지를 넘어 경전의 수준인 경학(經學)의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당시 경학은 금문(今文-그 당시 글자)과 고문(古文)의 두가지로 금문은 한나라때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예서(隸書)로 쓰여진 경서(經書)이며 고문은 진(秦)나라 이전에 쓰이던 옛날 글자로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자취를 감추었으나 집의 벽속에 감추어져 분서의 화를 피했던 글자들이 드물게 발견되어 왔다.
금문상서는 진(秦)의 분서(焚書)때 박사 복생(伏生)이 공자가 산술(刪述)한 상서(尙書)를 벽 속에 비장하고 있다가 진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한대(漢代)에 다시 꺼내어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에서 가르쳤던 것으로 그 글이 당시의 문자체인 예서로 적혀 있다 하여 금문상서라 하였다
과두문자로 기록된 고문상서(古文尙書)
한나라 경제 때에 노공왕(魯恭王)이 공자의 옛집 벽속에서 논어, 효경, 춘추 그리고 서경을 얻었는데 그 글이 대나무쪽에 옻칠을 해서 글자를 썼으므로 글자 모양이 머리통은 둥글고 꼬리는 가늘어 올챙이 같이 생긴 춘추전국 때에 사용하던 과두문자(蝌蚪文字), 곧 고문자(古文字)로 되어 있다하여 고문상서라 칭한 것이다. 이 때 발견된 고문상서는 옛글자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무제(武帝)때 공자의 11대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이것을 금문(今文), 곧 당시 언어로 번역하여 읽었는데 복생이 전한 금문상서보다 16편이 더 많은 45편이었다. 그러나 이 진짜 고문상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멸되고 말았다.
그 소멸 이유에 대해서는 한세대 김성일 교수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 귀신의 나라였던 주가 멸망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졌을 때 공자가 태어났다. 그 사상의 기본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이었다. 그는 요순과 하,은,주에 이르는 역사 ‘상서(尙書)’를 기록하고 신앙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 진시황제였다. 그는 동이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태산에 제사를 드리려고 나섰다가 동이족 창해역사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는 동이족 포섭을 단념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3년 후인 BC 215년에 만리장성 공사를 시작한다.처음 장성의 위치는 난하의 서쪽이었다.이는 동쪽의 조선을 막아 놓고 산동의 동이족을 박해하려는 계략이었다.그리고 그 3년후인 BC 212년에 동이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공자의 사상을 박해하는 것이다.그는 상서를 비롯한 공자의 책을 모두 거두어 불태웠고 그 제자 460명을 땅에 묻어 죽였다.
시황제의 아들 호해를 제거하고 진을 멸망시킨 사람은 역시 하화족 사람인 한(漢)의 유방(劉邦)이었다.그는 동이족의 지지를 얻기위해 멸실된 공자의 학문을 복원하겠다고 선언했으나 그것이 본심은 아니었다. 그는 살아남은 공자의 제자들을 모으게 하여 상서를 비롯한 공자의 책들을 기억나는대로 복원하게 했으나 하화의 나라였던 주나라의 통치이념을 그 책에 주입하고 종묘와 사직을 계속하게 한 것이다. 동이족이고 신앙인이었던 공자가 주나라의 통치이념을 사모하고 귀신 섬기기를 권하는 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공자 시대에는 종이가 없어서 대나무를 깎아서 글을 썼고 올챙이 모양의 과두문자를 썼다. 그러나 한나라가 만든 공자의 책은 종이에 예서로 쓴 것이므로 그것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하고 그것을 만든 학자들을 ‘어용(御用)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 어용학자들 가운데 ‘양심선언’을 한 사람이 있었다.그는 논어의 술이(述而)편을 기록하면서 목숨을 걸고 진실한 한마디를 써서 남겼던 것이다.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한 적이 없었다’..]-국민일보 2001,01,27
고문상서의 소멸 이유를 추적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은 아니나 김성일 교수의 위 견해 또한 음미해볼 만한 내용이다. 다만 금문파와의 싸움에서 패한 진본 고문학파들의 심혈를 기울였던 과두문자 해석이 올챙이 수준으로 전략하였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그 올챙이 운운은 조적(鳥蹟)을 눈밭에 찍힌 새발자국이라고 해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상상력의 빈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되기도 한다. 필기 재료의 성분으로 인해 글자체가 생겼다는 이론보다는 분명 과두, 곧 올챙이 머리 비슷한 표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 서체를 과두문자라고 표기한 것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글자는 일반인들이 접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 지배층, 혹은 제사장급들의 전유물로 중세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만큼 글자는 신성시 되기 때문에 필기재료에 따라 형태가 바뀔 성질이 아니었다. 기록물이 특히 신(神)과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제사와 관계돼 있다면 신을 표기하는 글자와 인간을 표기하는 글자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당연스러울 것이나 글자가 신과 인간관계를 기록하는 것이 아닌, 눈 밭에 찍힌 새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상상의 바탕에서는 신과 인간을 표기하는 글자들이 올챙이로 보이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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