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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택 기사입력  2011/08/27 [01:49]
창힐(倉頡)은 개인인가 집단인가
한자(漢字)는 '새부족의 발자취를 기록한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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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漢字)는 누가 발명했는가

<▲ 눈이 4개라는 창힐은 고문자를 다뤘던 학자가 아닐까. 수정을 갈아 돋보기로 썼음직도 하다.>
 
허신(許愼, 30 -124)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서 '황제의 사관 창힐은 새,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그 무늬가 서로 다른 것을 알고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黃帝史官倉頡,見鳥獸蹄迒之跡,知分理之可相別異也,初造書契)'라고 기록하고 있다.

A.D 100년에 발행된 허신의 [설문해자] (30권)은 한자의 모양과 뜻, 소리 등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한자 사전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동양 학문의 바탕이 되는 불후의 명작으로 추앙받고 있다.

허신은 유가(儒家)의 고전에 정통한 학자로 진나라 초기 고서체(古書體)에 의한 원전(原典)을 중시하는 고문가(古文家)였으나 애석하게도 허신 당시에는 최초의 문자자료라 할 수 있는 금문이나 갑골문 등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다. 갑골문이 발견된 것은 근세(1899년)의 일이고 금문이나 전국, 진.한 시대 죽간과 백서 등, 대량의 자료가 발견된 현대에 들어 허신의 문자해설에 대한 이견(異見)은 당연함에도 그의 한자 풀이 방법인 육서(六書) 이론은 지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육서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象形- “상형이란 물체의 굴곡(힐곡)에 따라 그 모양을 그린 것으로, 일(日), 월(月)자와 같은 것이다.[象形者, 畵成其物, 隨體詰詘, 日月是也.]”

(2) 指事- “지사란 보면 알 수 있고 살피면 그 뜻이 드러나는 것인데, 상(上), 하(下)와 같은 것이다.[指事者, 視而可識, 察而見意, 上下是也.]”

(3) 會意-“회의는 유형별로 모으고 그 뜻을 합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무(武), 신(信) 등과 같은 것이다.[會意者, 比類合誼, 以見指撝, 武信是也.]”

(4) 形聲-“형성은 사물의 유형(類形)으로 글자의 뜻을 나타내는 부분[形符]으로 삼고, 그 사물과 발음이 같은 글자로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聲符]으로 삼아 만든 것이며, 강(江), 하(河)와 같은 것이다.[形聲者, 以事爲名, 取譬相成, 江河是也.]”

(5) 轉注-“전주는 같은 부수에 속하는 글자끼리 같은 뜻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고(考), 로(老)와 같은 것이다.[轉注者, 建類一首, 同意相受, 考老是也.]”

(6) 假借-“가차는 나타내고자 하는 뜻의 글자가 없을 때 발음이 같은 다른 글자를 빌려서 대신 표기하는 것으로, 령(令), 장(長) 등과 같은 것이다.[假借者, 本無其字, 依聲託事, 令長是也.]

 

 글은 왜 생겨야 했는가

 

허신이 간과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왜 사람은 문자로 기록하고자 했는가라는 의문을 허신의 6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기록한다는 것은 그것이 글자가 됐든 아니면 자기만 아는 표시가 됐든 과거의 어떤 것을 미래에 잊지않기 위해 현재 남겨놓는 것이다. 곧, 과거의 어떤 행위를 미래에 잊지않기 위해 현재 표현하는 것이 문자의 첫째 목적이 되어야 한다. 미래를 기록하는 것은 문자의 생성원인이 아니다. 허신의 설문해자에서 빠진 이‘왜' 라는 질문이 이 연구의 출발이다.

 창힐은 누구인가

허신이 황제의 사관으로 한자를 만들었다는 창힐은 개인인가 집단인가를 검토해보는 것이 창힐에 대한 첫 추적 작업이 될  것이다.

개인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글이란 사회적 통념을 그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사회 구성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 형태를 보고 기록자의 의도(뜻)를 알아야 하는 것이 글의 첫 째 필수조건이 될 것이다. 창힐이 눈밭에 찍힌 새 발자국을 보고 글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창힐 개인의 감상(感想)이지 사회적 통념이 될 수 없다.

창힐이 황제의 사관 개인 창힐이 아니라 일정 세력을 갖춘 집단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도 2-30명의 집단이 아니라 지배세력의 힘을 좌우할 대규모 집단이라면 이들이 산등성이 찍힌 새 발자국을 보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한 때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니 탁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엔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에 황제 헌원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해 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 황제는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 수 없었고 또 창힐에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이는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삼성기전 하편)

또 [통지(通志)]씨족략(氏族略)에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倉頡)은 고신(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의 후예이다. 대극성(大棘城)에서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淮北)으로 옮겨 살았다 > 하였으니- 진나라 [천문지(天文誌)]

창힐이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면 글(文)을 만들어 사회적 통용이 되도록 했을 그 집단, 혹은 연구소의 이름이 나옴직도 하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들을 두루 교화 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우(尤)에겐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삼성기전 상편, 단군세기

임자 12년(B.C 2229년) 신지(神誌)인 귀기(貴己)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어 바쳤다.-단군세기

신축 3년(B.C 2180년) 신지(神誌)인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단군세기

임자 35년(B.C 2049년) 모든 한(汗)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원산에서 제사케 하고 신지(神誌)인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였다.-단군세기

한웅천황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革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신시본기 제3편

[천부경]은 천제 한국께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한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神誌) 혁덕(革德)에게 명하여 녹도(鹿圖)의 글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지(神誌)는 벼슬의 이름으로 개별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신지(神誌)란 신(神)의 뜻을 기록(誌)하는 집단 이름이었다.

신지(神誌)는 무엇을 기록하였나

창힐이라는 개인이 본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지(神誌)들이 속한 집단, 혹은 부족이 겪어온 지나온 내력을 기록한 것이 글자의 뿌리로 유추될 수 있다. 허신의 상상력처럼 눈 밭에 찍힌 새발자국(鳥跡)이 아니라 새를 토템으로 하는 신지(神誌)들, 혹은 창힐들이 속한 집단이 이들 부족의 발자취,  조적(鳥跡)을 기록한 것이 한자의 시원(始原)이 되어야 설득력을 갖게된다.

-박운택의 [금문(金文)으로 해석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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