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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MorningLonDon 기사입력  2016/10/02 [02:21]
왕정복고와 런던 대화재
박필립의 영국 역사기행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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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찰스 2세   © GoodMorningLonDon

 

1649년,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며 절대권력을 주장하던 찰스 1세가 청교도 혁명과 동시에 처형되고 난 후 크롬웰의 군사독재가 '잉글랜드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자 국민들은 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크롬웰이 1658년 병사한 후, 그가 유지했던 호국경 자리를 그의 아들이 이어받았으나 그는 아버지만큼 능력자가 아니었다.

 

1660년 5월, 영국 의회는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찰스 2세를 옹립하였다. 그는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군주인 찰스 2세로 왕관을 물려받았다. 찰스 2세는 다시는 망명(문자적으로는 여행이라 표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만 했다. 그는 언제나 원하는 바를 할 수 없다는 것과 때때로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일반적으로 의회는 그의 정책을 지지해줬다.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가 다시 국교로 승인되었으며 로마 카톨릭과 청교도가 권력에서 밀려났다.

 

찰스 2세의 통치 시기인 1665년 런던에는 대규모 역병이 창궐하였다. 빈민가에서 수천 명이 죽어 나갔다. 그 다음 해인 1666년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세인트 폴 대성당을 비롯한 많은 교회와 도시의 많은 곳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런던은 새로운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지었는데 이는 유명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웨렌 경이 설계하였다. 사무엘 페피즈는 이러한 사건들을 일기로 기록하였고 나중에 출판되어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다.

 

1679년 인신보호법(The Habeas Corpus Act)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매우 중요한 법이었다. Habeas corpus는 라틴어로 ‘당신은 (누군가를 구금하려면) 반드시 그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 법은 어느 누구도 불법적으로 감금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장했다. 모든 수감자는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명문화 한 것이다.

 

찰스 2세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자연 인식’을 증진하기 위해 왕림 학회를 설립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과학 학회이다. 초기 구성원 가운데는 혜성의 귀환을 성공적으로 예견하여 그 혜성이 ‘헨리해성’으로 불리는 에드문드 헨리 경과 아이작 뉴톤 경이 있다.

  

아이작 뉴톤(1643-1727)

잉글랜드 동쪽 린콘셔에서 태어난 아이작 뉴톤은 그가 켐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할 때 처음으로 과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출판물은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자연철학에서수학의 원리) 였다. 그것은 중력이 우주 전체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뉴톤은 또한 하얀 빛이 무지개 색깔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많은 것들이 현대 과학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뉴톤은 과학보다 성경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도 주목할 일이다.

  

런던 대화재

 

<런던이 정의의 피를 요구하리니

6이 세 번 반복되는 해에 불벼락이 내리리라.

고대의 여인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그와 같은 많은 전당이 소실되리라>

노스트라다무스 [Nostradamus, 1503 ~ 1566]

 

런던 대화재 1666년     © GoodMorningLonDon

<1666년 9월 2일, 푸딩레인에서 일어난 5일간의 화재로 런던의 80%가 전소되었다.>

 

그의 예언대로 지금부터 450년 전, 런던은 대화재에 휩싸이게 되었다.

1666년 9월, 런던은 대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잿더미로 화했다.

 

당시 런던은 인구 50만을 자랑하는 유럽 최대의 도시로서 흑사병 이후 감소하던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한 도시빈민촌이 확대 되는 중이었다. 대부분 집들이 판자로 지어졌고 길은 좁았으며 항상 크고 많은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런던 전역이 이러한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가 1666년 9월 2일 푸딩레인 지역에서 시작된 화재로 인해 도시 전역이 파괴되는 대참사를 겪게 된 것이다.

푸딩레인 어느 빵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로 시작된 화재는 마침 동쪽에서 불어온 강풍을 타고 도시 서쪽으로 퍼져가며 전 런던을 잿더미 속에 몰아넣었다.

당시 이 화재로 인해 1만 3천 가구에서 1만4천 가구에 이르는 도시의 80%가 전소됐으며 St. Paul 성당을 비롯한 도시 87곳의 교회가 불에 타 노스트라다무스의 ‘고대의 여인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 많은 전당이 소실되리라.’던 예언이 적중한 것이 되었다.

 

세인트폴 대성당, 리치몬드 공원에서 이 성당이 보일 수 있도록  시야를 가리는 건축물을 제한하고 있다.   © GoodMorningLonDon

<런던 대화재로 소실된 목조 세인트 폴 대성당을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er Wren)이 1710년 완성하였다.>

 

렌은 르네상스 양식의 계획서를 제출하였으나 교회를 중심으로 한 보수층에 의해 반발이 심해지자 중앙의 돔(직경 34m)은 바티칸 산 피에트로 성당을 모델로 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양쪽의 첨탑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 영국 건축사에 기념비적 건축물로 남아있다. 높이가 약 111m, 폭이 약 74m, 안 길이가 약 157m. 성당 본 건물의 수랑, 본단 회중석, '속삭이는 회랑 Whispering Gallery'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반대쪽에서 작은 소리로 소곤대는 이야기까지 들리는 것으로 ‘다빈치 코드’에 묘사돼 있다.

넬슨 제독,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M. 베리와 추리 소설가 반 다인, 나이팅게일, 성당 설계자인 렌 등 유명 인사들이 이곳에 묻혀있다. 처칠의 장례식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현재 이곳은 밀레니엄 브뤼지와 연결되어 있다.

 

거의 모든 것을 태워서 더 이상 탈 것이 남아있지 않게 돼서야 불길이 잡히고 이에 놀란 보험회사는 1667년 소방대를 설립하게 된다. 또한 지금 ‘문의 나라’라 불릴 만큼 많은 방화문(防火門)이 영국에 있는 연유도 이 대화재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대화재로 인해 빈민촌이나 다름없이 50만의 인구가 우글대던 판자집들이 없어지자 당시 왕실(王室)과 정부는 현대적으로 설계된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런던을 전면적으로 개혁할 야망을 드러냈다. 넓은 도로 양편으로 늘어선 멋진 건물이 늘어선 현대화된 도시…이러한 원대한 전면적 도시 계획에 대한 야망은 결국 불에 탄 자신들의 건물이 빠른 시일 내에 원위치에 복구되기를 희망하는 수많은 사람의 반대에 부딪혀 축소되고 말았다.

 

새로운 도시에 대한 진보세력과 옛것에 집착한 보수세력과의 갈등과 타협이 결국 지금 런던이 유럽의 여느 도시와 달리 현대와 중세가 공존하는 매력 덩어리 도시로 변모시켜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대화재 기념비    © GoodMorningLonDon

< 런던 대화재 기념비-The Monument<

1666년 런던 대화재 후 런던 재건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렌과 로버트 훅의 디자인으로 1677년에 완성되었다. 도리스 양식의 단일 원주 기둥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61m의 석조기둥이다. 311개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꼭대기에는 구리로 만든 불꽃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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