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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탈진은 어디에서 올까요?

김관성 목사의 광야의 외침 -21

김관성 | 기사입력 2013/11/13 [12:28]

영혼의 탈진은 어디에서 올까요?

김관성 목사의 광야의 외침 -21

김관성 | 입력 : 2013/11/13 [12:28]

 
오스 기니스의 책 <악마의 비밀문서를 훔치다>에 보면 촌철살인의 문장이 한 구절 등장합니다. “술에 절어 있는 사람은 쫓겨나지만 돈에 절어 있는 사람은 집사가 될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목회자의 자질 중 중요한 자리에 올라 서 있는 것이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여는 능력과 그들의 정력을 교회에 집중시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바른 중심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물질과 몸으로 섬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의 경향이 '은혜의 수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보다는 ‘교회 일’ 자체에 집중 되어가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 주일을 보내고 나면 ‘파김치’가 되는 것은 이제 교회 안에서의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동시에 그 날 선포되었던 말씀에 대한 기억은 하루가 지나면 자신의 머리를 떠나버립니다. 이들에게 있어 교회 일과 헌신의 내용들은 섬김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신의 훈장이 되어갑니다. 나팔을 불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죠.
 
이런 식의 시간과 세월은 신자를 효율을 위한 ‘기능적인 가치를 지닌 인간’의 자리에 머물게 만듭니다. 그 이상의 모습으로는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교회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기는 하지만 약간의 사나움을 그 특징으로 하는 ‘사찰집사님’의 모습을 자신의 이미지로 형성해가는 것입니다.
이제 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따뜻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주의 교회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은혜의 수단을 놓쳐버린 신자의 모습은 ‘말씀의 능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람됨’의 자리에 결코 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각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들이 아니라 그 분이 원하시는 사람됨의 자리로 초청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됩니다.
준비되지도 않은 채 직분을 받아 교회 일부터 배운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현대 세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차지하는 효율성을 중심으로 교회 일을 배운 사람들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그 일이 그들 자신의 영혼에 독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시간이 흘러 중심적인 자리에 갔을 때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명목으로 목회자의 직위를 위협하는 공룡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하시고 내려오시죠. 저에게 이런 정신과 행동을 가르치신 분은 바로 당신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일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음을 감지하는 목회자는 많지 않습니다. ‘부흥과 성장’ 이라는 유혹은 떨쳐버리기 힘든 것이기에 ‘일 잘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인식시키고자 하는 목회자들의 시도는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일까요? “양의 털은 억지로라도 깎아줘야지 더 잘 자란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잡무로 털이 다 깎인 양은 그의 영혼에 겨울이 찾아와도 자신의 몸을 데울 수 있는 털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영적 침체의 자리로 내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현상이 현실이 되어 교회를 장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활을 걸고 매달려야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당장 가시적인 효과를 가져 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신자 각 사람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케 하는 지름길입니다.
역사적 기독교회 안에 도도히 흘러왔던 전통적 가르침은 신자의 부르심이 ‘교회 안’에 있다고 교육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단련된 그 심령을 가지고 세속적인 일과 임무를 정직하고, 능력 있게 감당하는 것이 모든 신자의 소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언제 부터인가 ‘교회 일’을 신자 각 개인의 주된 사명으로 심어주고자 교회 안에서 ‘전 신자 사역자화’라는 말을 ‘구호화’ 해서 외치는 것을 봅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교회는 ‘만인 제사장설’을 성경적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곳이지 ‘전 신자 사역자론’을 믿고 고백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식의 논리는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자가 ‘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가져옵니다. 통상적으로 ‘사역자’는 누구의 도움과 돌봄도 없이 혼자 설수 있는 자리를 뜻하는데, 이것은 주의 교회의 현실을 부정하는 짓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일의 효율성을 위해 신자들의 마음에 헛바람을 불어넣는 종교적 레토릭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구호들 이면에 숨어있는 정신들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약간의 과장법을 동원하자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신자로서 기능하지 못한는 존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 각 개인은 교회 일에 유익을 가져다주는 효용적 가치로 평가받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 땅의 교회 안에는 자리를 지키는 일 이외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가시적인 ‘일하는 자리’로 몰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일과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무거운 짐을 안고 예배당을 찾은 지친 영혼들 중에는 설교 시간에 잠을 자다가 깨어나 몽롱한 정신 상태로 자신의 잠을 감추기 위해 ‘아멘’만을 습관적으로 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신자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지닌 고귀한 존재들이며 우리의 어두운 시력으로 다 파악하지 못하는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주의 교회 안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자리를 지키는 것은 대단한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힘을 제공해주는 사람들은 공 예배 시간에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교회 일’을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보통은 목회자를 제일 많이 괴롭히는 존재들입니다. 설명이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주의 교회는 각 신자에게 부여하신 복된 사명과 가치를 눈에 보이는 봉사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한 영혼의 존귀함은 ‘헌금과 교회 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무엇을 하는 자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제공해 주심으로써, 그 놀라운 은혜 안에 동반된 생명의 능력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섬기는 하나님은 자신이 하실 수 없는 일을 신자를 불러 대신 감당케 하시는 분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강단에서 외치는 자들의 메시지가 ‘그리스도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의 선물을 받아 누리라’고 깨우치지 않고, “모이세요, 돈을 내세요, 예배당을 세웁시다”에 집중하게 되면 설교자와 청중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들의 은혜의 샘은 메말라 가게 됩니다.
‘교회 일’의 당위성을 강조하다가 성도들로 하여금 ‘진정한 주의 일’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만들에 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 동참하는 일은 구속하신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할 때 자발적으로 신자의 삶속에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라고 외칠것이 아니라 우리 구주이신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죽을힘을 다해 외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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