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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 양날의 칼

김관성 목사의 광야에서의 외침-18

김관성 | 기사입력 2013/04/02 [21:44]

QT - 양날의 칼

김관성 목사의 광야에서의 외침-18

김관성 | 입력 : 2013/04/02 [21:44]
<자아가 중심이 된 말씀 읽기>

우리교회는 식당을 운영하는 분들이 두 가정 있습니다. 집사님 가정은 오리집을, 권사님 가정은 백반 집을 운영합니다. 자의와 타의로 두 곳을 자주 방문하게 됩니다. 어느 날 문뜩 이 두 집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식당에 걸어놓은 성경구절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이제 이런 본문의 진의에 대한 교정적 설교들이 많이 행해진 결과로 이 구절이 사업장과 어울리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갈길 이 먼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인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음 성급한 적용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문화를 부추긴 일등공신은 큐티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꾸준히 큐티를 하는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과정에 문제가 많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들고 가려고 했다가 마게도냐에서 ‘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선교 지를 유럽으로 변경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런 본문을 가지고 이상한 방향으로 은혜를 받고 적용으로 들어갑니다.

“아. 주님께서 이사를 명령 하시는구나” 이 정도면 병원에 가야할 수준으로 진입한 것입니다. 물론 풍자적인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일들이 큐티라는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내게 무슨 의미를 제공해 주는가?” 이런 식의 생각과 질문들이 하나님 말씀을 ‘적용 우선주의’로 몰아갑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우리의 필요와 유익에 상관없이 진리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의식 속에 ‘내게 필요한 말씀’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이나 말을 내뱉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무의식중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특정한 성경본문은 읽지 않는 것입니다. 벌써 심각하게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레위기와 요한계시록 같은 책이 왜 성경에 포함되었는지 모르겠어. 성경의 족보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이런 원인들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다양하겠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너무 무거운 진단을 내리는 것 같지만 사실을 반영한 분석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을 보면 처음에는 건축과 예술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점차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철학과 문학 분야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공세는 눈에 띄게 두드러져 보입니다. 특히 자크 데리다, 하롤드 블룸, 스탠리 피시 같은 인물들은 텍스트 상에서의 특정 본문이 고정된 불변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이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부연설명하자면, ‘특정한 본문에 어떤 의미를 강요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특정한 단어, 문장, 단락은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개별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독자반응비평 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조들이 힘을 얻게 되면 주관성이 객관성을 압도해버리는 결과가 발생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내가 주체가 되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가 중요하지 하나님 말씀 안에 담겨진 계시의 의미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내 자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인 것처럼 나에게 유익이 없는데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어”

실제적으로 자아가 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큐티를 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자아에 집착한 그 영혼의 장난감이 된 것입니다. ‘성서도구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 한 영혼의 걸음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가치에 함몰된 특정 개인이 하나님 말씀을 인위적으로 조합한 뒤에 자신의 필요에 맞추어 그 의미를 취사선택 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자아의 내적 경험’을 강조하는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을 비판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자아의 영상으로 이해한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슐라이어마허라는 인물을 알든 모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아의 필요’라는 창을 통해서 말씀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아의 필요만’을 위해 존재하는 작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한 영적/종교적 현상의 너머에 계신 하나님은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의 영역을 벗어난 하나님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큐티를 열심히 하는 그 행위가 절대적인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큐티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관점과 필요에 대한 포기가 선행되어져야 합니다.

‘내게 유익한 말씀’을 찾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요구와 명령 앞에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신자들의 삶에서 열매를 맺고 성취되어 가는 과정은 고통과 눈물이 동반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큐티는 그만 두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유명한 장난감 ‘레고’로 둔갑시키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 말씀을 읽는 이유와 태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말씀 안에 서려있는 뜻이 자신의 인생을 고난의 현장으로 내 몰아 가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평강 중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말씀하소서. 종이 듣게 나이다” 바로 이 정신 살아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큐티는 양날의 칼입니다.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이 일을 해나가느냐에 따라 그 영향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을 자기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마시고 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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