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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인생길 그러나……>

김관성 목사의 광야에서의 외침-17

김관성 | 기사입력 2013/03/18 [22:00]

<힘든 인생길 그러나……>

김관성 목사의 광야에서의 외침-17

김관성 | 입력 : 2013/03/18 [22:00]
 

지난번 엠비시 라디오 <휴먼 다큐 우리>에 출연했던 방송을 어떻게 하면 들을 수 있느냐고 물어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명한 목사의 지나온 삶을 다시 듣기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ㅎㅎ. 그때 당시 마이크 앞에서 토해놓았던 내용과 편집 때문에 방송에 담기지 못했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보았습니다.

태어나서 방이 두 개가 있는 집에서 살아본 첫 번째 경험은 아내를 만나고 나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고향 교회 반지하 방에서 저의 인생에서 가장 넓은 사적인 공간을 그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
가난은 참으로 지독스럽게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이 모든 원인을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 때문입니다. 철이 들어 아버지란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이후, 저의 기억 속에 그려진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요. 구타 쟁이오. 노름꾼이었습니다.

새벽시장을 죽을힘을 다해 사수하면서 벌어 온 어머니의 돈을 아버지는 독일의 나치 군대보다 더 독하게 갈취해갔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존재 이유를 자신의 노름 밑천을 공급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일 년 365일 중 300일 이상, 오후 7시 이후의 우리 집은 동네 아저씨들의 노름판으로 변했습니다. 달랑 한 칸의 방안에 7~8명의 아저씨가 둥근 원을 그리고 앉아 새벽 3~4시까지 화투패를 돌렸습니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배속은 술로 채워넣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방구석에 처박혀 이불을 덮고 매일매일 그런 환경 속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돈을 많이 따먹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돈을 잃고 난 뒤에 닥쳐오는 무서운 폭력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상이 빗나가는 날은 없었습니다. 아저씨들이 다 떠난 새벽, 돈이 바닥난 아버지는 그 분풀이를 어머니에게 풀었습니다.

포크와 젓가락이 아버지의 도구였습니다. 포크로 어머니의 머리를 찍었습니다. 선혈이 어머니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던 수많은 날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힘이 없었던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아버지. 제발 엄마 그만 때려요.” 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입니다. 어린 저는 가난, 폭력, 더러운 욕, 비명에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그것은 매일매일의 통과의례였습니다.

그러한 시간이 쌓여가는 동안 저의 영혼은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상처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삶의 유일한 동력은 그저 불쌍한 어머니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잘되어 엄마 호강시켜 드려야지.” 저의 하나뿐인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엄마를 향한 연민이 인생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가장 큰 원천이었습니다.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참 많이도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흘렸던 서러운 눈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해서 우는 것인지, 내 처지를 비관해서 우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 노래는 저의 영혼에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왜 이리 불행할까?” “나는 왜 이런 아버지를 만났을까?” 이런 식의 고민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에도 삶의 신비와 수수께끼 앞에서 좌절했던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때가 많았습니다. “목사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죄지 뭐” 이런 식의 탄식이 입버릇이 되었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로 계속 살아야 하나?” 항상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처지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답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만 더 나은 환경을 주시면 좋겠는데 저에게는 그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가는 길은 항상 여러 가지의 장애물들이 놓여있었고, 그 중심에는 돈이라는 놈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교회 개척도 돈이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소명을 주시고 이 길을 가게 하시나요?” 이런 식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쏟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서러웠고 견디기 어려운 굴욕감을 내게 안겨주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이의 제기를 하나님을 향해 올릴 때도 주어진 현실의 짐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습니다. 삶은 여전히 저를 괴롭혔고, 저의 인생은 여전히 회색이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해되어어지지 않는 이런 종류의 고민,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 부인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런 내용이 내 속에서 함께 공존하면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한 시간이 쌓여가던 어느 순간 내게 주어진 삶의 현실을 부인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실 안에서 숨 쉴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믿음으로 당당하게 이겨낸 삶을 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만 허락되는 은혜는 붙잡았습니다. 그것이 저를 살게 했고, 성장시켜 갔습니다.

이제 서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벗어난 좋은 환경이 은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만 소유할 수 있는 눈물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참된 은혜임을 고백하는 자리에 이렇게 서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의 참담한 현실들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더듬어 볼 때 억울하고 이가 갈리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왔던 삶의 객관적인 현실은 모질고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저의 마음은 감사와 노래로 채워져 있는 이 신비를 여러분도 맛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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