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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대의에 냉담한 교회

김관성 목사의 광야의 외침-5

김관성 | 기사입력 2012/06/04 [09:42]

공동체 대의에 냉담한 교회

김관성 목사의 광야의 외침-5

김관성 | 입력 : 2012/06/04 [09:42]

<시기와 질투의 문제-살리에르 증후군>
 
“질투는 자기가 못 가진 것을 향해서만 생기는 감정이지만, 시기는 자기가 갖고 있으면서도 생기는 탐욕이다. 질투는 시기보다는 깨끗한 감정이다. 질투 때문에 잘 될 수 있지만 시기 때문에는 망가지기 쉽다. 스스로에게 질투는 힘이 되고 시기는 폭력이 된다. 질투는 예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기는 예쁘지가 않다. 질투는 사랑과 동경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시기는 반목과 질시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질투는 자기가 못 가진 것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시기는 남의 것을 뺏거나 얻으려던 것을 못 얻으면 자기 것마저 잃는다.”

<마음 사전>에서 김소연 시인이 언급한 말입니다. 이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갑니다. 저도 한창 영어 공부를 할 때의 방법론이 이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일단 꼴 보기 싫은 사람 중에서 저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을 임의적으로 선택합니다. 그런 다음 독한 마음을 먹습니다. “저 놈을 넘기 전에 영어 책을 놓는다면 나는 개다” 이런 식의 승부욕으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인간들은 선한 동기에서는 열정과 뜨거움을 좀처럼 발생시키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사람들을 섬기고 도울 수단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질투를 미화시켜 보지만 사실은 시기와 동일선상에 놓여있는 죄의 또 다른 한 단면입니다.
“자기 잘남과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서야 비로소 열정이라는 것을 발생시키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을 어떤 분야에서든지 이기거나 꺾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시기와 질투의 정신 인 것이죠.
 
이런 시기와 질투에 근거한 승부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에게 내재되어져 있음을 봅니다. 혹시 ‘살리에르 증후군’이란 말을 들어 본적이 있나요?

모차르트의 생을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이자 궁중악사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동시대의 천재 모차르트로 인해 자신이 평범한 인물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작가하게 됩니다. 그는 그 사실로 인해 열등감으로 몸부림치고 절망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살리에르는 천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실력이 모차르트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으로 인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등장하지요.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런 증상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살리에르 증후군’이라 합니다.
 
인간들은 인류역사라는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도 ‘살리에르 증후군’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정복할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암이나 에이즈 보다 더 무서운 질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모양과 형태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이 증후군은 싸움이나 투쟁의 강한 이미지나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대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 질 때는 공동으로 추구하고 이루어야 할 어떤 대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냉담 하는 형태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경향들이 하나님의 일에도 침투되어져 주님의 몸된 교회까지 오염 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삼서 1장 9-10절> 말씀을 보면 참 재미난 인물이 한 사람 등장합니다. ‘디오드레베’ 라는 인물이지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라고 표현 되어져 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불안케 하는 유일한 것은 자기 자신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디오드레베’는 사도들로 인해 자신의 위치에 불안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자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살리에르 증후군’을 발생시킨 것 같습니다.
 
자기가 잘되고 이기기 위해서 상대방의 실패를 즐기는 이러한 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렇게 살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하나님께서 이끄시고 들려주시는 음성은 시기와 질투에 근거한 성장과 발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쟁해서 누군가를 이기는 방식보다 더 효율적이고 더 아름답고 더 고상하고 더 우아한 삶의 방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 안에는 현대판 ‘디오드레베’들이 넘쳐납니다. 자기 자신의 잘남을 부각시켜 대장이 되어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주의 교회 안에 왜 이리 많은지요?
 
무엇보다 슬픈 것은 인위적으로 ‘디오드레베’들을 양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교회성장의 동력으로까지 활용하고 있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남을 이겨보려고 하는 몸부림”이 시기와 질투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 바닥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가 성취하고 이룬 것을 종교적 겸손으로 화장하고 다듬어서 마음껏 펼쳐 보이는 현장이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러한 ‘자랑꺼리’가 없다는 객관적 현실 때문에 서러움의 눈물을 쏟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알아가고 배워가는 신앙의 여정 속에서 ‘시기와 질투’의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의 영적 성장은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오래전 읽었던 책인 김진홍 목사님의 <새벽을 깨우리로다>에 등장하는 문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함을 주는지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력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심장을 뜨겁게 펌프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보십시오.
그것이 지극히 세상적인 원리인 시기와 질투에 근거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됨이 내 안에서 엔돌핀의 충만한 분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믿음의 소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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