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요크
"요크의 역사는 잉글랜드의 역사다."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이며 영화 '킹스 스피치' 주인공인 킹 죠지 6세가 요크를 두고 한 말이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도시 가운데 으뜸인 역사적 도시인 요크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로마군이 300년 넘게 주둔했던 군사적 요충지에서 정복왕 노르망디 공작의 요크 초토작전, 그리고 30년이 넘는 왕족들의 싸움인 장미전쟁을 거쳐,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AD 71년, 로마 최고 정예부대인 제9군단 5,000명의 군인들이 요크에 주둔하면서 역사에 등장하는데 제9군단은 그 후 50년이 지난 AD 120년경, 유령처럼 사라져 지금도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고 있다. 최근작으로 Centurion (The Ninth Legion: 2010년 )과 The Eagle이 있다. 제9군단이 바람처럼 사려진 후에도 로마군의 주둔은 AD 410년까지 계속된다.
요크에서 발견되는 로마의 유물은 2%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로마 유적의 상당량이 비밀에 쌓여있다. 지금도 굳건히 서있는 로마 요새의 흔적으로 다각형 요새(Multangular Tower)가 있다. 요크 대성당 지하 또한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요크 박물관 담장인 로마시대 요새 ▲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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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정식종교로 승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7년 전 영국 요크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 요크 민스터 광장에 자리잡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상▲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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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시작
AD 410년, 천하무적의 로마가 이탈리아 본국으로 철수하자 무주공산이 된 잉글랜드를 차지하기 위한 유럽 대륙의 부족들이 대규모로 밀려든다.
먼저 건너온 섹손족들이 지금의 켄트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자 뒤이어 앵글족들 또한 물밀듯 쳐들어온다.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켈트족들은 앵글로 섹손족에 밀려 북쪽과 서쪽으로 쫓겨나고 이들 새 점령군들은 7개의 왕국을 건설한다. 북으로부터 노섬브리아, 머시아, 이스트앵글리아, 에섹스, 웨섹스, 켄트, 서섹스 등 지금의 잉글랜드 전역을 이들 앵글로 섹숀족이 차지하게 된다. 요크는 당시 노섬브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AD 789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킹들이 영국 해안지방을 약탈하더니 잉글랜드 동부와 스코틀랜드 지역에 자신들의 사회를 형성하며 머물기 시작했다. 바이킹족의 요크 침략은 866년 11월 1일 시작됐고 요크를 점령한 이들은 로마군들이 불렀던 Eboracum이라는 도시명 대신 Jorvik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이 요르비크가 요크라는 이름으로 정착된다.
무자비한 바이킹이라 알려졌음에도 요크에 정착한 이들 바이킹족이 머물렀던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들은 땅을 일궜으며 뛰어난 수공업을 통한 조선기술을 발전시켰고 예술 창작작업 또한 활발했다. 정착 바이킹들은 지역 사회와 융합되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크리스찬으로 개종하였다.
오늘날에도 이들 바이킹족들의 유산이 Stonegate, Petergate에서 JORVIK Viking Centre 등이 바이킹족의 본산인 스칸디나비아식 길거리 이름인 'Gata(gate)'라고 불러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바이킹족의 후예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가 바로 요크이다.
천 년이 넘는 요크 푸줏간 거리 ▲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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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요크, 요크 박물관▲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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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의 멸망(476년)과 함께 고대 시대가 갈무리 되고 중세(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던 1453 AD까지 )가 시작된다. 중세 초기(476-1000년)가 끝나갈 무렵, 영국에서는 역사의 새 장이 시작된다. 바로 정복왕 윌리엄이 전 잉글랜드를 휩쓴 것이다.
8세기 무렵에는, 약탈을 업으로 삼던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을 비하하는 뜻으로 노르만(북쪽 촌놈들)이라 불렀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다. 바이킹에서 유래한 이들 노르만족은 900년 경, 그 세력을 확대하더니 당시 프랑크 왕국(오늘날 프랑스) 북부지역에 자리를 잡고 노르망디공국로 불릴 정도로 강성해졌다.
이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이 파죽시세로 잉글랜드를 침공한 것이다. 1066년 10월 14일, 영국 남동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해럴드 국왕을 전사시키고 그 해 말에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대관식을 갖게 된다. 잉글랜드에서 노르망 왕국을 건설한 바이킹의 후예가 있는 반면 일부는 이탈리아 남부를 병합하여 시칠리아 왕국을 지배할 정도로 이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어쨋거나 노르망디 공작이라고 하나 프랑스화된 프랑스의 봉국에게 점령된 것은 프랑스에게 점령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어를 모르는, 프랑스 말을 쓰는 새 국왕 덕분에 영국 왕실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용화되었고 영어는 평민들의 언어가 되어갔다.
노르망디 공국과 잉글랜드를 차지한 노르망 왕조의 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왕국의 땅을 능가하였다. 결국, 땅 문제는 프랑스와 백년 전쟁의 발단이 된다. 이 백년 전쟁을 통해 노르망 왕조는 완전히 앵글로 섹손족과 연합하게 되고 노르망 왕조 후손들이 자연스럽게 잉글랜드 귀족층으로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윌리엄 공작이 잉글랜드를 휩쓸 때 요크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윌리엄의 북벌은 무자비했다. 런던과 마찬가지 전술로 저항하는 지역을 포위하여 음식을 비롯한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후세 역사가들은 윌리엄의 북벌정책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 윌리엄의 무자비한 정복전쟁으로 1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정복왕 윌리엄 이전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다. 워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마친 윌리엄 1세는 런던 방어와 권력 과시를 목적으로 템즈 강 변에 석재를 써서 화이트 타워와 런던탑을 쌓았다.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한 28미터 높이의 프랑스에서 수입한 석회석으로 지은 요새는 볏짚과 진흙, 목재 건축물만 보아왔던, 기꺼해야 로마군들이 쌓았던 일부 석재 성벽이 전부였던 피정복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노르망인들은 건축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특히 윌리엄 공작은 노르망디의 수도였던 Caen에 '성삼위일체 (Basilica of the Holy Trinity)'성당을 건축했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상륙지점이었던 노르망디 해변가에서 주요 공략도시였던 깡Caen에 있는 이 성당은 당시 총알 자국이 선명한 채 지금도 그 웅장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
노르망디 윌리엄 공작이 힘을 쓰던 때의 유럽은 잦은 전쟁 때문에 튼튼한 건축이 가장 중요한 때었다. 두꺼운 벽체와 둥근 아치, 육중한 기둥, 길게 늘어선 기둥 아래의 공간(아케이드), 대칭적 평면 구조 등의 뚜렸한 로마테스크 특징을 갖고 있다.
윌리엄 당시 건축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그 규모가 한마디로 엄청나다는 것이다. 윌리엄의 건축 보좌관은 생베르탱 수도원의 고셀린 수도사였다. 그는 석재 건축물이라고는 변변한 게 없던 잉글랜드에 건축과 관련한 지침을 정리했다.
'놀랄만하고, 위엄있고, 빛이 가득찬 확 트인, 무엇보다 특별히 아름다울 것'
이것이 윌리엄 왕이 영국에 소개한 대륙의 건축 양식으로 후세에 이것을 고대 로마식 건물을 본떴다 하여 '로마네스크(Romanesque- Roman 로마 +Esque 式'양식이라 이름 붙였다.
이 형식으로 재건축된 최초의 건축물이 켄터베리 성당이다. 엄청난 길이를 특징으로 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후대에 증축될 때는 대부분 넓이를 강조한 로마네스크보다 높이를 강조하는 고딕양식이 가미되었다. 157미터 높이의 독일 쾰른 대성당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에 고딕양식이 첨가된 건물이다.
요크민스터 지하에는 로마시대 때의 석재 기초석이 전시돼있다. ▲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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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완 윌리엄 공작이 세운 Caen에 '성삼위일체 (Basilica of the Holy Trinity)'성당. 로마네스크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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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셍미셀 수도원 또한 정복왕 윌리엄 공작의 후원으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에 뾰족한 고딕양식이 융합된 형태다. 전쟁이 빈발하던 이 당시 중세는 수도원들이 여차하면 요새로 사용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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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몽셍미셀 수도원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1017-1144). 당시 노르만 공작의 후원하에 지어진 몽셀미셀은 요새화된 수도원이었다. 덕분에 윌리엄 공작은 영국 정벌에 대한 지지를 몽생미셀 수도원으로부터 받게된다. 백년전쟁 당시 몽셀미셀은 점령 불가능한 요새로써 영국군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이 한 때 수감되었던 감옥으로 쓰일 정도의 몽생미셀은 튼튼함을 가장 중요시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요크 민스터 또한 윌리엄 정복 이후에 건축된 작품이다. 이 대성당은 627년 노섬브리아 에드윈 왕의 세례를 위해 지어진 목조 예배당이었으나 현재의 석조 대성당은 1220년 당시 유행하던 고딕양식(뾰족한 첨탑)으로 지어졌다. 길이 163m, 넓이 76m, 높이 61m의 대성당은 건축 시작 후 220년이 지난, 1472년에야 완공된다.
노르망 왕조 시대에 전 영국에는 윈저성을 비롯한 1,000여 개가 넘는 석재 성들이쌓여졌다. 그 엄청난 규모와 높이는 피정복민들이 감히 대항할 염두를 에초부터 차단할 정도로 '누가 이 땅의 주인인가'를 확실히 인식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영국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윌리엄이 소개했다 하여 노르만 건축이라고도 부른다.
중세의 끝 -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1337년에서 1453년이라는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기나긴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명목상으로는 잉글랜드 왕실에서 프랑스 왕좌를 요구하는 전쟁이었지만 실질적 내막은 땅을 두고 벌어진 쟁탈전이었다. 이때만 해도 전쟁이란 왕실들 간에 서로 동맹 세력들을 끌어들인 싸움이었으나 백년 전쟁을 거치며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들이 영국의 확실한 왕족으로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들 후손은 방대한 왕가 가문을 형성해 나갔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플랜태저넷 가문과 프랑스의 발루시아 가문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을 걸고 116년간 전쟁을 치렀다.
유럽 역사를 뒤바꾼 이 백년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영국은 대부분 유럽 영토를 영구히 잃게 되고 말았다.
프랑스에서 대부분 영토를 상실한 영국 귀족들은 전쟁터에서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외부 프랑스와의 전쟁이 아닌, 내부에서 귀족들 간에 생존 싸움의 시작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백년 전쟁이 끝난 2년 후, 1455년 시작된 귀족들 간의 전쟁은 그 후 1487년까지 30년이 넘게 지속됐다. 요크 공작 리차드가 랑카스터 가문의 서머셋 공작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랑카스터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장미와 요크가문의 백장미를 들어 장미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1485년, 외가인 랑카스터 가문을 대표한 헨리 투더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요크가문의 리차드 3세를 전사시키고 헨리 7세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30년 동안의 귀족 가문들 전쟁으로 왕의 세력을 위협했던 많은 제후와 기사들이 몰락한 덕분에 헨리 7세는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헨리 8세로 아버지가 확고하게 잡아준 권력을 배가시켜 엘리자베스 1세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게 된다.
백년 전쟁 후유증으로 일어난 장미전쟁, 장미전쟁으로 귀족들의 붕괴로 자연스럽게 왕권이 강화됨으로써 영국이 세계의 강자로 떠오르는 일련의 과정을 요크는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장미전쟁의 종식을 기념하기 위한 요크대성당의 거대한 장미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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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헤서는 고성능 줌 카메라가 필요할 듯...▲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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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 아트겔러리-1▲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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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 아트 겔러리-2▲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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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 아트 겔러리 -3▲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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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 아트 겔러리-4▲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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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 박물관에서 ▲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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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뜨락에서 ...▲ © GoodMorning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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