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라는 국가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킹스톤 All Saint Church © GoodMorningLonD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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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톤 시청 마당에 있는 대관식 돌에 세겨져 있는 7명의 왕 이름.
•Edward the Elder, son of Alfred the Great, 900AD
•Athelstan, 925AD
•Edmund I, 939AD
•Eadred, 946AD
•Eadwig, 956AD
•Edward the Martyr, 975AD
•Ethelred the Unready, 979AD © GoodMorningLonD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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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이 넘은 킹스톤 마켓, 킹스톤 17만 인구 가운데 10% 이상인 1만 5천 정도의 한인들이 유럽 유일의 한인촌을 이루고 있다. © GoodMorningLonD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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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이라는 섬나라를 360년간 지배하였던 로마가 410년 본국으로 떠나자 이들에게 쫓겨 북쪽으로 달아났던 픽족이 성벽을 넘어 브리튼을 침략하기 시작한다.서부해안에서는 아일랜드인들이, 동부해안에서는 색슨족들이 약탈을 감행하자 브리튼의 켈트족들은 로마에 구원병을 요청하나 당장 자신들의 존망 위기에 처한 로마에서 구원병이 올리가 없다.
결국, 삼면에서 밀려오는 침략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브리튼의 켈트족들은 대륙에서 주트족(Jute)을 용병으로 고용하기에 이른다. 주트족이 지금의 켄터베리에 자리를 틀고 앉자 원주민 켈트족들이 쫒겨나는 상황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들 주트족이 컨터베리를 중심으로 켄트왕국을 건설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유럽 대륙으로 퍼지고 이 소문을 접한 게르만 부족들이 앞다투어 브리튼 섬으로 몰려들었다. 유틀랜드 반도(지금의 덴마크반도) 남쪽에 웅거하고 있던 색슨족이 몰려들어 불과 14년 만에 브리튼 남부지역에 서식스 왕국을 건설한다. 그 몇 해후, 다른 색슨족이 건너와 햄프셔와 월트셔에서 브리튼인들을 몰아내고 웨식스 왕국을 세운다. 그리고 동부지방에는 또 다른 색슨족이 에식스 왕국을 건설한다.
가장 막차로 들어온 앵글 족들은 이스트 앵글리아와 머시아, 그리고 중북부 지방에 노섬브리아 왕국을 건설하여 켄트, 서식스, 웨섹스,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머시아, 노섬브리아라는 7개 왕국의 시대를 열게되고... 이들이 사용한 언어가 현재 영어의 기초가 된다.
브리튼의 방어를 로마에 의지했던 켈트족들이 결국 로마가 떠나자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고 그것도 용병으로 고용했던 외부 세력에게 쫓겨 변방으로 몰려나는 신세를 맞이하게 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대목은 작금의 한반도 정세를 가늠하는 표석이 될 만하다. 국방을 외부세력에 의존한 채, 자신들의 방어를 책임진 군대는 부패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상황에서 그 외부세력이 떠나게 됐을 때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쨌거나 아무리 힘이 없다 하더라도 로마 문명을 접했던 브리튼인들이 야만족인 색슨족과 앵글족에게 무저항으로 자신들의 땅을 내준 것은 아니었다.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Ambrosius Aurelianus)라는 걸출한 영웅이 등장하여 이들 앵글족과 색슨족을 상대로 한판 거하게 뜨게 되는데…그게 바로 원탁의 기사로 유명한 아더왕(King Arthur) 이야기다.
그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인지 다른 실존인물인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아더왕에 대한 전설은 브리튼인들에게 낭만적으로 묘사되어 가장 많은 영화 주제가 되고 있다.
선주민과 도래인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AD 600년경 앵글로 색슨 왕국이 영국땅(Britain)에 세워지게 된다. 이러한 왕국들 대부분이 주로 지금의 잉글랜드 지역에 세워졌다. 이 왕들 가운데 한 왕의 무덤이 콘스터블 고향인 서퍽(Suffolk) 지역인 서튼 후(Sutton Hoo)에서 발견되었다. 이 왕은 보물과 갑옷 등과 함께 매장됐는데 27미터짜리 갤리선에 모두 실려진 채 흙으로 덮여 매장되었다.
7세기 초중반(624년 혹은 625년) 경으로 추정되는 왕의 사망과 함께 매장된 보물들은 대부분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으며 현지 유적지에는 실제 크기의 배 무덤이 전시대 있다. 웨일즈의 대부분과 스코틀랜드는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앵글로색슨족이 처음 영국에 올 때는 이들은 기독교도들이 아니었으나 이 시기 동안 선교사들이 영국에 건너와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은 북쪽 지역으로 진출했는데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교사가 성 패트릭(St Patrick)으로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성 콜롬바(St Columba)는 지금의 스코틀랜드 해변에서 떨어진 아이오나 섬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로마에서 선교사들을 이끌고 온 성 오거스틴(St Augustine)은 남쪽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했는데 그는 나중에 켄터배리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바이킹족
AD 789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바이킹들이 영국 해안지방을 약탈하더니 잉글랜드 동부와 스코틀랜드 지역에 자신들의 사회를 형성하며 머물기 시작했다. 브리튼지역의 앵글로족과 색슨족에서는 알프레드 대왕(King Alfred the Great)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바이킹들을 패퇴시켰다.
데인법(바이킹 언어에서 유래한 그림즈비와 스컨소프와같은 많은 지역의 이름들)으로 알려진 침략자 바이킹들은 잉글랜드 북동쪽에 머물렀다. 정착 바이킹들은 지역 사회와 융합되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크리스찬으로 개종하였다.
앵글로색슨 왕들은 덴마크 왕이 지배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지금의 잉글랜드 지배를 계속했다. 이 왕들 가운데 첫 번째 왕이 뉴트왕으로 크누트라고도 불렸다.
북쪽에서 바이킹들의 침략 위협은 사람들로 하여금 케네스 맥알핀왕(Kenneth MacAlpin)밑에 일치단결 하도록 하였다. 스코틀랜드라는 용어가 그 나라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킹스톤, 잉글랜드의 발상지
서남부 브리튼 원주민인 켈트족을 몰아내고 그 땅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은 색슨족들은 AD 838년, 에그버트 왕 때부터 왕실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재영 한인촌이 있는킹스톤 지역이다.
킹스톤 한복판에 있는 지금의All Saints Church 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 지역은 서부섹손 왕가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킹스톤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Cyningestun에서 파생한 것으로 왕의 영지, 곧 왕이 직할하는 땅( tun, ton, 혹은 don은 농장을 의미)이었다. 왕가 소유의 영지(King’s Tun) 역사는 지금도 The Royal Borough of Kingston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러지고 있으며 4개의 Royal Borough(Kensington & Chelsea , Greenwich and Windsor & Maidenhead)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에그버트 왕의 손자인 알프레드 대왕(849-899)은 브리튼의 앵글족과 섹손족을 합류시켜 할아버지인 에그버트왕이 통일시켰던 왕국(런던, 켄터베리,요크 등)을 멸망시킨 바이킹족과의 대를 이은 복수혈전을 통해 이들 야만인들을 기독교로 복종시킨다.
알프레드 대왕의 손자인 에드워드 엘가 시대에 이르러서야 영국왕(The king of England) 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사용된다. 잉글랜드(England)라는 명칭의 유래는 'Land of the Angles'로 '천사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당시 기독교의 번창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